빌립 (주후 54년)

초대 교회 무대를 점유한 두 이름의 빌립이 있다. 한 분은 사도 빌립으로서 최초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이다. 다른 사람은 예루살렘 신자의 급증으로 특별한 필요를 위해 선택된 일곱 중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이다. 두 사람은 복음 전도에 불타는 마음을 가졌고 후기 역사에 보면 그들의 삶이 서로 잘 어울렸다. 그들의 이야기가 제각기 나타나거나 혹은 여러 딸들을 가진 아버지로 나타나기 때문에 복잡해진다. 요한복음에는 사도 빌립이 여러번 기록되었으나 사도행전에는 단 한번 나온다(행1:13). 사도행전에 나온 빌립 집사는 사도행전 8장에 누가에 의해 기록되기를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을 회심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뿐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훗날 빌립 집사는 예루살렘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을 같이 섬겼다(행 21:8)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전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 접촉했다.

사도 빌립은 갈릴리 바다 근처 가버나움과 가까운 북이스라엘의 한 마을, 벳세다 출신이다. 그의 비 유대적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문화를 세계로 퍼트릴 때 로마가 점령하기 전 헬라 문화와 헬라 언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가르쳐준다. 라틴어가 아닌 코이네 헬라어가 그 시대의 상업언어인 것을 보면 로마가 모든 것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증거한다.

요한은 우리에게 빌립의 활동의 네가지 방면에 빛을 던진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요 21:43) 그 젊은 제자는 즉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초청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을 운명에 맡기지 않고 도구로 인정받기를 더 원한 겸손한 청년이다. 단번에 그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겼다. 역시 빌립은 오천 명 군중을 먹이기 위해 양식을 사는 비용을 계산하기 위해 의논한 사람이다(요 6:7). 수단과 돈의 부족에 관한 실제적 관찰이 예수의 기적적 행동을 단순히 높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 하나님이 일하기에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다른 경우,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려 할 때 빌립은 그들을 접하는 중개 역할을 했다. 요한은 벳세다와 빌립의 관계를 그들의 전략적인 이유로 언급한다(요 12:21).

역시 요한은 마지막 만찬 기간, 예수님께 대한 빌립의 요청을 기억했다. 빌립이 말하기를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빌립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모든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요 14:9-10).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불신앙에 떨어지기 쉬운 부활의 사실을 훗날에 기억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빌립의 헬라식 이름과 그의 이중 언어 구사력과 외부 활동에 능한 인격이 복음을 위해 준비된 메신저로 만들어지기 위해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잘 화합된 믿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도 빌립을 둘러싼 특징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프랑스로 알려진 한 지역과 관계된다. 그는 고대 지방인 고울(Gaul)에서 복음을 전파한 유일한 사도이다. 전통적으로 사도 빌립은 터키 서부 히에라폴리스와 연결되었다. 그가 그 도시에서 이끈 교회는 요한계시록 첫 부분에 나온 일곱 교회 밖에 있었다. 사도 요한에게 비춰진 빌립의 독특성은 요한복음에 빌립의 말과 활동을 돋보이게 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적으로 히에라폴리스는 프러시아의 배경을 갖는다. 그 지방의 종교는 뱀으로 상징된 사바지오(Savazios)으 우상을 섬겼다. 지리적으로 히에라폴리스는 거대한 미네랄 온천 기지로 치료의 능력을 가진 지방으로 알려지자 세계 도처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이는 곳은 사도적 선교지로서 매력적이었다. 역사적으로 히에라폴리스는 큰 크리스챤 도시로 전해진다. 비록 바울으 회중 전도지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 교회는 바울의 선교 여행 결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은 여러 고대 교회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빌립은 자기 생명을 교회 보전하는데 바쳤다. 히에라폴리스의 이교 제사장들은 많은 세계 사람들의 방문에서 얻는 유익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빌립의 직접적 메시지 도전으로 불편했을 것이다.

십자가형은 로마식의 처벌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의 탁월한 설교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초대 선교사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유이다. 빌립의 경우에 신앙적 파수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했다. 분명히 그들의 계략은 복음을 멈추기에는 비효과적이란 사실을 한번 더 증명한 셈이다.

삼상 22:2 낮은 마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2)

[설명]

고난은 쓰나 바로 당할 때 달콤한 은혜를 체험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낮은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다윗의 환난 당함은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 곧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으로서의 연단 기간이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 곧 문제로 고통하는 그들 마음과 연합한 것이다. 낮은 마음으로 낮은 사람들을 접할 때 배워지기 쉽다. 심령의 가난 상태 곧 절대 빈곤 의식에 하나남과 그의 은혜가 머문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은 다윗 시대에도 마찬가리며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복된 길이다 (마 5:3)

삼상 24:1-22

1. 기름 부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성령을 부어 성령으로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도구라면 모신 성령님께 협력하고 순종함으로 모든 일을 성령의 사역이 되게 해야한다.

2. 하나님 자리의 월권을 싫어하고 늘 하나님과 교감 있는 다윗의 살아 있는 신앙을 본다. 절호의 기회에 사울의 목을 쳐도 될 법 한데도 사울의 겉 옷자락만을 베었다. 그것도 악심보다는 사울을 사랑하는 증표로서 그리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여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다윗처럼 나도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인 예민한 영감을 소유하고 싶다.

삼상 2:26 바른 성장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삼상2:26)

[설명]

경건한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사무엘의 성장 과정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을 받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장 표현을 생각케 한다.(눅2:52) 육체적, 지성적, 사회적 성장보다 영적 성장이 기본이다. 사무엘의 경건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무수한 연단 과정을 통해 말이 하나도 그냥 땅에 떨어짐이 없는 영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의

타락한 엘리의 지도 아래 있었어도 온전한 영적 성장을 이룬 것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잘 받아 그대로 순종하는 좋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거듭난 신자의 성장이 바로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잘 받는 순종의 마음을 가져야한다.

벧전 4:14 성령의 임재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4)

[설명]

베드로 전서의 특징은 환난 속에 있는 신자가 어떻게 사는 지혜를 보여주는데 있다. 이리가운데 있는 양처럼 긴장, 고통, 상처, 죽음의 위기가 엄습할 때 교회는 불행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평안할 때 하지 못한 은혜를 체험하고 누리는 순간이란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이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상투적인 용어가 아니라 시련의 때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라는 것이다. 고난이 다가 올 때 믿음으로 바로 받으면 즉, 복음 때문에 욕을 당하면 반드시 영광의 영이 임하여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체험은 정말 신비로운 사건이다. 성령이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그 일을 이길 힘이 생기고 그 일을 통해 지혜를 배우게 하며 신앙의 차원을 높인다. 사도들은 위험을 제해달라는 기도보다 이 위협을 감당할 능력을 받아 복음증거를 더 강하게 하는 상승작용을 체험했다. 감당할 시험만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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