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9:1-11

1. 열방에서 높아지신 하나님. 다윗의 소년 시절에 불레셋 사람 골리앗을 무찌른 영향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 뿐 아니라 불레셋에도 계속되었다. 다윗이 만명을 죽인 것은 아기스와 방백도 아는 정보이다 그 영향으로 왕은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열리고 방백은 두려워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계속되었다.

2. 이스르엘에 진 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불레셋 땅에 머무르던 다윗이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다. 아기스 왕과 방백들과의 반목은 다윗이 출전하여 동족인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모면하게 된다. 다윗의 애매한 고난의 환경과 같은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느브갓네살의 교만

교만은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죄악이다. 모든 죄악의 뿌리가 교만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아담의 죄며 인류의 죄며 세상 마지막 심판 요인이 되는 죄악이다. 그래서 히포의 어거스틴 (Augustine) 이 그리스도인이 가질 첫째 덕이 겸손이며 둘째 덕도 겸손이고 셋째 덕도 겸손이라고 한 말은 진리이다.

무엇이 교만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는 마음이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되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못한 자는 저절로 교만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어느 하나도 내 힘으로 되었다고 말할 것이란 하나도 없다. 먹고 마시고 하는 것에서 움직이는 건강, 오늘이란 시간은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하나도 하나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이런 은혜 의식이 없을 때 인생은 교만해진다.

교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생기는 열매이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니까 자기가 주인이란 말이다.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인생은 망한다. 느브갓네살 왕은 120도나 되는 큰 영역을 다스리는 바벨론 군주였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나라의 부강이 자기 힘으로 되는 줄 착각하고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화자찬 하자마자 하나님은 즉각 그를 낮추셨다. 그렇게 영특한 군주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뺏을 때 그는 들짐승처럼 풀을 뜯고 이슬을 맞아도 아무렇지 않은 들나귀처럼 되어버렸다. 그 후 하나님이 주셔서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국권이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이해와 시인은 매우 중요하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치 않을 때 일어나는 죄악이다. 바른 교훈에 착념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보는 눈을 갖는다. 그 세계를 본 자가 어찌 교만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그의 마음에 죄악이 싫어지고 오만한 자리가 위태로운 자리임을 알아 그 자리를 피하기 때문이다.

불황의 때야말로 그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그의 무한한 은혜를 감사하는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이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립 (주후 54년)

초대 교회 무대를 점유한 두 이름의 빌립이 있다. 한 분은 사도 빌립으로서 최초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이다. 다른 사람은 예루살렘 신자의 급증으로 특별한 필요를 위해 선택된 일곱 중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이다. 두 사람은 복음 전도에 불타는 마음을 가졌고 후기 역사에 보면 그들의 삶이 서로 잘 어울렸다. 그들의 이야기가 제각기 나타나거나 혹은 여러 딸들을 가진 아버지로 나타나기 때문에 복잡해진다. 요한복음에는 사도 빌립이 여러번 기록되었으나 사도행전에는 단 한번 나온다(행1:13). 사도행전에 나온 빌립 집사는 사도행전 8장에 누가에 의해 기록되기를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을 회심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뿐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훗날 빌립 집사는 예루살렘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을 같이 섬겼다(행 21:8)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전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 접촉했다.

사도 빌립은 갈릴리 바다 근처 가버나움과 가까운 북이스라엘의 한 마을, 벳세다 출신이다. 그의 비 유대적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문화를 세계로 퍼트릴 때 로마가 점령하기 전 헬라 문화와 헬라 언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가르쳐준다. 라틴어가 아닌 코이네 헬라어가 그 시대의 상업언어인 것을 보면 로마가 모든 것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증거한다.

요한은 우리에게 빌립의 활동의 네가지 방면에 빛을 던진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요 21:43) 그 젊은 제자는 즉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초청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을 운명에 맡기지 않고 도구로 인정받기를 더 원한 겸손한 청년이다. 단번에 그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겼다. 역시 빌립은 오천 명 군중을 먹이기 위해 양식을 사는 비용을 계산하기 위해 의논한 사람이다(요 6:7). 수단과 돈의 부족에 관한 실제적 관찰이 예수의 기적적 행동을 단순히 높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 하나님이 일하기에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다른 경우,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려 할 때 빌립은 그들을 접하는 중개 역할을 했다. 요한은 벳세다와 빌립의 관계를 그들의 전략적인 이유로 언급한다(요 12:21).

역시 요한은 마지막 만찬 기간, 예수님께 대한 빌립의 요청을 기억했다. 빌립이 말하기를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빌립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모든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요 14:9-10).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불신앙에 떨어지기 쉬운 부활의 사실을 훗날에 기억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빌립의 헬라식 이름과 그의 이중 언어 구사력과 외부 활동에 능한 인격이 복음을 위해 준비된 메신저로 만들어지기 위해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잘 화합된 믿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도 빌립을 둘러싼 특징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프랑스로 알려진 한 지역과 관계된다. 그는 고대 지방인 고울(Gaul)에서 복음을 전파한 유일한 사도이다. 전통적으로 사도 빌립은 터키 서부 히에라폴리스와 연결되었다. 그가 그 도시에서 이끈 교회는 요한계시록 첫 부분에 나온 일곱 교회 밖에 있었다. 사도 요한에게 비춰진 빌립의 독특성은 요한복음에 빌립의 말과 활동을 돋보이게 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적으로 히에라폴리스는 프러시아의 배경을 갖는다. 그 지방의 종교는 뱀으로 상징된 사바지오(Savazios)으 우상을 섬겼다. 지리적으로 히에라폴리스는 거대한 미네랄 온천 기지로 치료의 능력을 가진 지방으로 알려지자 세계 도처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이는 곳은 사도적 선교지로서 매력적이었다. 역사적으로 히에라폴리스는 큰 크리스챤 도시로 전해진다. 비록 바울으 회중 전도지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 교회는 바울의 선교 여행 결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은 여러 고대 교회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빌립은 자기 생명을 교회 보전하는데 바쳤다. 히에라폴리스의 이교 제사장들은 많은 세계 사람들의 방문에서 얻는 유익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빌립의 직접적 메시지 도전으로 불편했을 것이다.

십자가형은 로마식의 처벌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의 탁월한 설교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초대 선교사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유이다. 빌립의 경우에 신앙적 파수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했다. 분명히 그들의 계략은 복음을 멈추기에는 비효과적이란 사실을 한번 더 증명한 셈이다.

삼상 22:2 낮은 마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2)

[설명]

고난은 쓰나 바로 당할 때 달콤한 은혜를 체험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낮은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다윗의 환난 당함은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 곧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으로서의 연단 기간이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 곧 문제로 고통하는 그들 마음과 연합한 것이다. 낮은 마음으로 낮은 사람들을 접할 때 배워지기 쉽다. 심령의 가난 상태 곧 절대 빈곤 의식에 하나남과 그의 은혜가 머문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은 다윗 시대에도 마찬가리며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복된 길이다 (마 5:3)

삼상 24:1-22

1. 기름 부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성령을 부어 성령으로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도구라면 모신 성령님께 협력하고 순종함으로 모든 일을 성령의 사역이 되게 해야한다.

2. 하나님 자리의 월권을 싫어하고 늘 하나님과 교감 있는 다윗의 살아 있는 신앙을 본다. 절호의 기회에 사울의 목을 쳐도 될 법 한데도 사울의 겉 옷자락만을 베었다. 그것도 악심보다는 사울을 사랑하는 증표로서 그리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여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다윗처럼 나도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인 예민한 영감을 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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