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브니엘 목회단상

30년의 미주 목회 회고

한국에서 신학을 졸업하고 곧 미국서 교회를 개척한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흘러 30여년이 훌쩍 넘었다. 평생 한 교회를 섬기겠다던 나의 의지는 그대로 반영되어 10여년이 지난  오늘날 브니엘 교회와 연합하여 후임목사가 되어 근10여년을 섬기고 8.12일이면 정식으로 사임을 한다. 그렇게 된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8년전에 맞은 중풍 후유증으로 액숀을 취하기에 지장이 있어 활기찬 목회를 하지못해 교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아픔으로 시작한 캄보디아 교육선교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 교회의 파송 선교사가 되어 여기에 평생 적을 두고 활동하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하면 사임한후 나는 이 교회의 선교사로서 캄보디아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다. 30년의 나의 목회를 돌이켜 보면 몇가지 기억되는 것이 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개척을 시작하고 금방 수백명이 모여올 것이란 기대를 가졌으나 전혀 다른 일들이 전개되었다. 성경으로 땅을 정복하는 교회가 되게하리라는 목표에 따라 초창기부터 집집마다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신앙성장반에서 혹확과 생활을 13주에 걸쳐 가르치며 성경공부를 그렇게 강조하며 그대로 실행하였다. 어느 가정은 문밖에서 30분 기다렸는데 퇴근한 교인이 오늘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고 어떤 이는 신앙이  약한 남편이 페인트 일을 마치고 돌아와 쉽게 공부하도록 북 마크를 성경에 여기 저기 붙여 놓아 새빨간 눈으로 성경을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만난 그 집사님은 지금, 성경2000절을 암송한다고 하고, 섬기는 교회에서 여자 모임에 설교까지 하는 책임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모두 목사님의 성경공부 가르침 덕분이라고 감사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공부한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서 성실하게 섬긴사역한 장로들, 권사들로서 일하고 있다. 캄보디아 사역에도 내게 별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성경을 공부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작은 모임일지라도 성경이 바로 들어가면 사람이 변하고 그 변화는 어떤 조건에서도 그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브니엘 교회에 온 후 나의 사역은 후임 2년만에 스토록을 만나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중풍이 그렇게 힘이 빠지는 것이라고 미처 몰랐다. 설교할 때마다 잡히지 않는 혈압으로 오늘 설교하다가 죽을 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을 수없이 가지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임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난관에서 나는 글 쓰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손으로 타잎핑을 하고 머리가 아파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던 때가 이제는 옛말이 되어버렸다. 그 덕분에 많은 글을 번역하고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었다. 사실 캄보디아의 교육 선교는 그 동안의 모든 설교, 교재 그리고 연구 번역한 내용들을 영역하여 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온종일의 가르침 사역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이 사역이 나의 생애 마지막이 될 것처럼 보인다.  일정한 선교사의 훈련도 없이 시작한 사역이지만 꿈은 대단하다. 캄보디아를 중심하여 동남아시아에 개혁주의 신앙을 심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 뜻이라면 적어도 20년 동안 사역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안

흔히 우리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 모던시대 혹은, 뉴에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포스트모던이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고 생각하는 세속 철학의 하나이다. 그 속에는 절대자 하나님의 권위마저 인정치 않는다. 결국 그 자신이 절대 권위이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 발상이다. 극도의 인본주의가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이 시대는 벌써 성경이 예고한대로 적그리스도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무대이고 인본주의의 실상을 드높이는 때라고 말할 수 있다.

권위를 부정하는 식의 방법은 성경시대에도 계속 나타났다. 에덴의 아담의 반역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고 르호보암의 실책(대하10:,11:)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솔로몬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통치를 위하여 자문을 구할 때 가벼운 짐을 원하는 노인층의 제안보다 강력한 리더쉽을 원하는 젊은층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는 포스트모던 형태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자신을 강하게 하는 길이 성읍을 견고하게 하고 강한 무기를 생산하고 왕실을 견고케 하기 위해 처첩과 자녀를 많이 두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인간적 리더쉽으로 강성을 꾀하였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인간의 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무조건적으로 전통의 권위나 성경의 가르침의 권위를 경멸하고 자기의 지혜와 수단을 자랑할 때 그는 현대판 포스트모던주의를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교만이고 징계이고 멸망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극복한 길은 무엇인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받아드리고 그것을 표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바른 교훈인 성경을 떠나면 저절로 부패하고 세상적 정욕의 지배를 받아 하늘의 지혜를 알지 못하게 된다. 새로운 꿈을 가지고 나가나 기준이 없는 것이기에 결국 실패한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일차적 대안이다. 성경의 사상을 내 것으로 삼아 굴복하여 그리스도 중심한 체계로 만드는 것이다. 그때 그는 절대 권위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서 섬김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는게 된다. 이것이 소위 섬김의 리더쉽이다. 자율주의의 권위는 멸망의 길로 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대안이다. 이것을 일거리로 삼아 삶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새로운 방법이란 따로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계속 파수하는 것이 우리시대의 포스트 모던 사상을 극복하는 길일것이다. 계시인 성경에 의존된 구원만이 강하게 하고 복되게 하고 이기는 길이다. 르호보암 리더쉽은 망하는 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섬김의 리더쉽을 배워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온유와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유지하려고 심혈을 쏟는 것이 우리 시대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그 길을 가자.

보편 교회

보편교회란 모든 그리스도인 곧,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다. 쉽게 말하면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으로 구원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킴으로 그 속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들도 들어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24장로의 어린양을 향한 찬양 속에 모든 방언, 모든 족속,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선택받은 사람들로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보편 교회이다.

그 개념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구약에도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그 중 우리는 시편 87편의 고라 자손의 찬양에서 이것을 발견한다. 시온을 노래하는 시인은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대상이요 모든 족속이 그에서 나오고 모든 근원이 그에게 있다고 했다. 특히 4절에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불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낫다 하리로다.”라고 할 때 이미 보편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 애굽을 가리키는 라합과 바벨론은 이스라엘 구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무대로서 마귀, 세상 그리고 사망을 상징한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의 본산지로 하나님의 구원과 전혀 상반된 원수이고 대적자이고 철저한 지옥 자식들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자 곧 구원받은 자들이 나온다는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이사야의 예언 속에 장차 애굽의 중앙에 제단과 성소를 세울 것을 예언하신 것과 통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애굽 속에서도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은 자들이 나올 것을 보인 예언이다.

바벨론 역시, 종말시대에 하나님을 아는 구원 역사가 일어나는 시대에 보편교회에 소속될 부류가 있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벧전5:`13절에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라고 언급한 베드로의 관찰에는 바벨론에 있는 보편 교회를 보여준다. 그리고 불레셋과 두로 곧, 가나안의 원주민인 그들에서도 자기 문제를 들고 주께 나아와 믿음이 큰 여자라고 칭찬을 받은 가나안 여인이 일어났고 또한 에디오피아의 조상으로 알려진 구스 역시, 빌립의 전도로 복음을 받은 간다게 국고를 맡은 구스의 내시가 이 반열에 들어선다.(행8:27)

온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우리 시대에는 이 보편교회의 가르침이 더 실감있게 되었다. 방학만 되며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온 세계의 타 종족들에게 단기 선교, 장기선교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할지라도 그들 속에 택한백성 곧 보편교회 일원이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 전에 감추인 비밀, 복음을 전할 때 감추워 있는 보편교회는 나오도록 되어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섬기는 캄보디아의 선교지에도 보편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자 중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교회

에베소서를 통해 보여진 영광스러운 교회가 세상에서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인다해도 반드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다. 동성애 죄가 버젓이 선의 모습으로 활개치며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초를 흔드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라도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을 나타낼 이유는 창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 경륜(administration) 때문이다. 교회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가?

첫째, 그리스도 계시와 사도와 선지자들의 교훈이 그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 20절에 너희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와 그리스도의 모퉁이돌 위에 세워졌다고 말함은 교훈 곧 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특별계시로서 자기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계시의 요점은 그리스도이고 그의 구원하심이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이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하고 교훈인 성경 계시를 믿음으로 세워진다. 그래서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성경과 연합되어 그 열매를 나타냄으로 보여진다. 만일 교회가 성경을 떠나 다른 교훈과 결탁된다면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명하다.

둘째, 그 안에서 통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언약 관계를 나타낸 말이다. 그리스도는 왕, 남편, 주인되시고 교회는 신하, 아내 그리고 종이란 것이다. 이 말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란 말로 가장 잘 표현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만물을 다스리고 특히 만물의 충만을 교회 안에 넣어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권자란 것이다. 그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 경륜울 중심하여 통일을 이루게 하신다. 교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한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 보좌 앞에 서서 그를 영원히 찬송할 때 최고의 영광스러움으로 나타난다. 사도는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의 영광스러운 연합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불완전한 지상 교회 속에 성령은 끊임없이 영화로운 교회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일하고 계신다.

셋째, 그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하나님의 보좌와 같다. 법궤 위의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그 안의 시은좌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지금 교회 위에 머물러 있다. 창조의 역사를 주도하시고 구속의 역사를 주도하신 임재의 영은 지금도 교회 위에 임하셔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도하시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이루시려고 부단히 일하신다. 창세 전에 세우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은 그의 임재하심으로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문제 많은 이 세상에 있는 전투하는 교회는 그와 동행하는 임마누엘이 최고의 복이 된다. 아들을 영화롭게하신 성부는 그 안에 있는 교회를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상태로 가장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두운 밤을 지나가는 교회는 그 영광스러운 빛 안에서 자기의 빛을 보고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어야 할것이다.

구원의 영광

그리스도인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나타난 영광을 봄으로 풀려진다. 바벨론의 포로귀환이나 출애굽 사건은 과거에 나타난 구속의 그림이다. 죄사함으로 시작되는 구원은 어떤 형태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나타내는가? 과연 구원의 영광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잘 보인 시편85:10-11은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고 말한다. 마치 처녀 총각이 서로 연애하는 장면을 생각케 하는 그림이다. 만나고 입맞추고 그리고 서로 사모함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생명을 나누는 구원은 정적이거나 수동적이지만 않고 동적이며 능동적이다. 이것이 구원의 영광이 비추이는 현장이다. 거기에 나타난 구속의 은혜인 하나님과의 연합은 실제로 어떤 것인가?

첫째, 인애와 진리의 만남은 그 영광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인애란 사랑이고 진리란 진실성을 가리킨다. 이 둘의 만남이 첫 연합이고 기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실의 만남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어떤 무엇이 끊을 수 없다.(롬8:39) 그러므로 진리 없는 사랑은 악하고 타락이며, 사랑없는 진리는 균형을 잃어 치우친다. 사랑과 신실만으로도 아름다고 능력있고 유익하지만 서로가 만나질 때 더 아름다워지고 강해진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둘의 만남의 스파크는 불을 피우듯이 새로운 열매를 나타낸다.

둘째, 화평과 의의 입맞춤이 그 영광의 누림이다. 이 둘의 입맞춤은 아들에게 입맞추는 메시야의 시편을 생각하게 한다.(시2:) 구속의 영광을 누리는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질 때 생겨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우선 의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때 구원이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화평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는 이웃과의 화목의 근거가 되기에 바울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했고(롬12:17-19) 야고보는 화평을 심고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했다. (약3:18) 화평이 있느냐? 그 배경은 의가 있을 것이고 의가 있느냐 곧 화평이 다가올 것이다. 이 둘의 입맞춤은 구속받은 자가 항상 누리는 열매이다. 복음은 이것을 목표로 역사한다. 영생의 삶이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라면 그 내용이 바로 그 입맞춤이다. 그것은 성령이 능력의 세례받음이라고 말하는 퓨리탄의 성령관과 통한다.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는 베드로의 경험이 바로 이것이다. (벧전1:8)

셋째, 진리와 의 간의 사모심이 그 영광의 광채이다. 구속의 은혜는 만남과 입맞춤만이 아니라 서로의 사모심의 열정으로 표현된다. 땅에서 솟아나는 진리를 내려다보고 응원을 보내고 만나고 싶어하는 인격적 교류를 항상 놓치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스데반이 돌탕에 맞아 순교할 때 하늘 보좌에 계신 인자께서 서서 지켜 보셨듯이 의는 항상 말씀에 신실한 마음을 향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준다. 때로는 치료의 광선으로, 때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붓는다. 성령안에서 그의 영광을 보는 자는 그의 형상으로 변하여 간다. 이 경외심이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한다.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진리와 사랑은 이 연합을 통하여 더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선한양심이 파선되고 방황하는 우리 시대에 이 구속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실재를 즐거워하는 삶만이 이 곤고의 터널을 잘 통과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