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노래하게 하고 찬송하게 하며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하여 인류를 죄 가운데 떨어뜨려 사망이 찾아 온 것은 물론, 영광 받을 대상을 자신 곧, 사탄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것이 행복의 거처였는데 사탄과 자기를 예배함으로서 그 자리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참 예배자로 있느냐가 행복을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예배의 모양 속에 참 예배가 없다면 더 큰 불행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더 선명히 보여졌다. 시편 대부분을 기록한 다윗이 예배를 배웠을 때 행복함을 알고 교회로 하여금 어서 와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며 악기를 동원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며 무릎을 굻고 경배하자고 권고한다.(시95:) 그 예배의 행복은 분열왕국으로 어두워진 엘리야시대에도 동일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보인 번영이란 우상에게 예배하고 무릎을 굻고 혼신을 쏟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음으로 마쳤지만 엘리야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혼자라 할지라도 경배할 때 참 행복을 맛보고 후대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예배가 행복의 주소이며 거처라고 가르치는 부분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더 밝히 드러나 성령 받은 모든 신자들은 누구든지 예배자로 살아감으로 하늘 행복을 누리게 하셨다. 버림받은 무명의 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보여주신 것도 이것이었다. 겨우 그녀가 생각하는 먹는 음식, 마시는 물, 의식주의 보이는 차원의 행복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으나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행복은 예배하는 자의 것임을 보여주셨다. 예배의 대상이며 본이신 나사렛 예수님이 친히 예배자의 섬김으로 이 여인을 섬겨 그녀를 놀라운 구원의 자리와 예배의 자리로 이끄셨다. 그가 주님과의 대화 속에 죄를 지적받고 회개하였을 때 어느 사이에 성령의 은혜는 그를 참으로 예배하는 자로 변화시키셨다. 그래서 그녀의 최초의 발견으로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예배의 시간과 장소에 관심을 쏟았다. 어설픈 관찰이지만 성령은 예배에 대한 행복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어디서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기만하면 하나님을 만난다고 가르쳐 주셨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예배 속에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떤 태도로 예배했는지는 모르나 그 순간에 그녀의 마음은 참 예배의 거처에 머물러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그 행복의 힘은 물동이를 두고 일시적 만족에서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온 동네에 소개하고 외칠 수 있는 전도자로 변한 것이다. 참 예배 속에 행복이 있다. 그 안에서만 우리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역사의 한 연장선인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퓨리탄의 예배에서도 우리는 그 행복이 다시 확인된다. 그들은 고국을 떠나 개척지에 예배자로 왔다. 도착하자마자 그해 겨울에 절반이나 죽고 앞 일이 막막했으나 그들은 참예배의 자리로 나갔다. 이 예배 속에 진정한 복이 있음을 알고 언제나 광야의 심부름꾼이나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원한 것이다. 참 예배자의 행복을 누리는 감사절이 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