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토마스 크랜머는 말년에 단 한 가지 부족한 일을 행했다. 그는 영국 교회의 리더며 왕의 자문으로 가장 유명한 신앙서를 발행한 편집자였다. 대주교인 그는 넓게 여행했으며 두 번 결혼했고 임종하는 군주의 손을 잡은 사람이다. 그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순교에 직면할 때 가져야 할 용기였다.

토마스 크랜머는 겸손한 가정에서 시작하여 서방 크리스챤을 통해 명성을 얻기까지 높아갔다. 그는 캠브릿지를 졸업하여 사제로 안수를 받고 젊은 시절에 국가 최고의 권위들을 자문할 수 있는 모든 땅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때 자신의 군주가 폭군 헨리 8세였는데 군주에 대한 충성과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냉철한 감정적 거리를 둠으로 그를 돌이켰다. 정말 헨리는 자기 눈에서 벗어나면 아내들을 감시했고 친구들을 배신자로 죽게 했다. 그래서 헨리가 크랜머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을 때 새로운 고위 성직자는 단지 그가 일하는 동안에만 계속되리라고 추측했다.

정말 크랜머의 유능함이 알려졌다. 헨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결혼을 그는 인정했고 헨리가 요구하는 모든 이혼을 크랜머는 합법적이라고 시인했다. 마침내 영국은 교회 자체가 가진 참 교리 곧 왕의 교회칙령을 이해하는 대주교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헨리 계승자인 에드워드 6세가 영국을 개신교 믿음으로 더 가까이 나가게 하는 동기가 됐다. 크랜머는 지도력 발휘와 영향 미침에 형통했다. 은밀하게 그는 독일의 개혁자 앤드레아스 슬랜더의 딸을 자기 아내로 취했다. (안수받기 전 그의 첫 아내는 출산하다 죽었다.) 공적으로 그는 앵글리칸 예식서를 기록하였는데 공기도서로 불리워 오늘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역전했다. 에드워드가 죽자 소심한 대주교는 헨리 8세의 큰 질녀이며 개신교도,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지지했다. 그녀는 등극했으나 9일이 지난 후, 캐톨릭 신자인 헨리의 첫 아내, 아라곤 캐더린의 딸인 메리가 왕이 되었다. “피 흘리는 메리”의 등극은 영국 교회를 또 다시 어둡게 만들었다.

1553년 11월에 크랜머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는 불타 죽는 니콜라스 니들레이와 휴그 래티머 개혁자들을 비난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가 첫 번 안수 받을 때의 동료들인 메리의 옹호자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머리털을 밀고 그의 오른 손끝을 찔렀다.

1556년 3월 20일 밤, 감옥에 있던 크랜머는 극도의 비천함으로 굴복했다. 다음날 아침에 그를 기다리는 형틀의 두려움 때문에 로마 감독을 그리스도 교회의 참 머리임을 공언하고 서명했다. 진리에서 얼마나 멀리 떠났는지 그는 떨었다.

다음날 크랜머 자신도 마지막 시간의 자기의 침착과 용기에 놀라게 되었다. 그의 참된 확신을 공적으로 선언하라는 요청을 받자 지난 밤에 굴복한 것을 철회하고 로마에서 분리된 니케아 신경의 믿음을 담대히 전하면서 지난 저녁 밤에 서명한 더러운 오른 손을 먼저 불 속에 집어넣었다.

그날 아침 9시에 그는 형틀에 쇠로 만든 밴드에 묶여질 때 불 속에 손을 넣으면서 “이 손이 죄를 범했나이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말하면서 그는 고통가운데 화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