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야고보 (주후 44년)

체포, 체형 그리고 위협이 보편화되었다. 신자 그룹은 헤롯의 감옥에 잡혀갔다. 그들 중엔 사도인 야고보도 포함되었다. 그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을 괴롭히기 위해 보통 유대 지도자의 주장으로 로마 지도자들이 수행한 것으로 골치 거리였다. 그러나 갑자기 야고보를 재판 없이 끌어내어 칼고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충격이 되었고 박해자들의 기세는 드높아갔다(행 12:1-1).

야고보의 복음이 헤롯 편의 정치적 실험 대상이 된 것이다. 전영병에 감염되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관해 법정 말다툼이 생겨 골치 아픈 일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극도의 비난을 일으키는 것 외에 어떤 그릇된 일을 행치 못했다. 그러나 구 정치가들이 그의 정치적 집단 중에서 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헤롯은 크리스챤 몇 사람을 제거하는 결정을 했다. 베드로를 죽이려는 그의 계획이 실패하자. 더 나은 계획을 세우기 전 그 나라에 또 다른 위기로 혼란을 맞았다. 얼마 안 있어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임을 당했다(행 1:23).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최초의 사도적 순교자가 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그의 죽음은 예수의 부활 승천 후 14년 이내에 생겼다. 단지 스데반만이 유명한 초기 순교자들 가운데 야고보를 앞 설뿐이다.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박해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전 지역을 다니는 일들이 사도들에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결국 주님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대위임령의 약속은 보존이 아니고 임재인 것이다.

이상하게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그들 모친이 예수님께 특별한 자리를 구했을 때 예수님에 의해 기억되었다. 예수님은 “네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마 20:22)”고 물으셨다.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고 즉시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이 없으셨지만 다른 열 제자들은 자기들 보다 더 나은 특권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정말 나의 잔을 마시리라(마 20:23)”고 응답하셨다. 그이 말씀은 예언이었다. 야고보는 먼저 죽었고 요한은 마지막까지 살았다. 그들의 죽음은 사도의 순교 이야기 속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들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 보내실 때 우리는 야고보에 관한 최소한 정보를 얻는다. 그의 형제 요한은 복음서에 그 일 때문에 야고보를 언급하진 않았다. 단지 다른 제자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와 구분시키기 위하여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큰)로만 불렀을 뿐이다.

역사적 문맥에서 14년은 큰 공백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3년 사역만이 3년을 충실히 커버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이 헤롯의 칼에 야고보가 죽기전, 14년간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예수 승천 후 그 기간은 예루살렘에 있는 급증한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주장을 거절하고 그를 죽인 유대 지도자들과 평정을 유지하려던 로마 권력자들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 위협과 고문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들은 신자 박해의 밀물의 흐흠으로 빛난다. 그러나 누가는 사울의 스승인 랍비 가말리엘을 포함한 중요한 순간들을 기록한다. 그는 신자 박해를 반대하지 않고 크리스챤을 죽이려는 자기 산헤드린 제자들에게 주의 환기시켰다. 그는 순교의 능력을 이해했다. 가말리엘은 말하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고 했다. 관대한 조치를 받은 예루살렘만은 신자들이 보호를 받았지만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느리게 했었다. 스데반과 야고보의 죽음은 결국 그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은 교회를 바람처럼 흩어 놓았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손에 무엇을 얻은 특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신자를 감옥에 넣는 일은 예루살렘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사울이 갑자기 크리스챤을 체포하는 일을 계속하자 많은 사람이 안전을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유익을 가져왔고 사울 생애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역시 그는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사울(바울)은 산헤드린의 박해 책임자로서 임명되었을 때 예루살렘의 상황은 수년 동안 고착상태가 되어있었다.

옛 스페인 교회는 야고보 시신의 유골을 보존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그가 죽기 전 스페인 선교 여행에 수년간 예루살렘을 떠나있는 증거를 보여준다. 누가는 야고보가 외지로 나갔다는 언급에 관한 무엇을 사도행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땅 끝인 지중해 끝보다 더 먼 곳의 긴 여행 동안 어부 출신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개척자적 선교 사명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