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순교자들 (600-1500)

쥴리안 황제(361-363)가 로마 제국에서 이교주의를 부흥시키려 했다할지라도 그 길은 암울했다. 데오도시우스가 이교예배를 억압하는 정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392) 이것은 교회의 선교 확장 노력에 힘을 빼놓았다. 패트릭은 5세기 크리스챤의 믿음을 아일랜드에 전파하였다. 스코틀랜드 수사들은 600년경, 수준이 더 낮은 영국에서 복음을 전했다. 아일랜드 수사들은 500-1000년에 선교사로서 유럽으로 돌아갔다.

로마 감독이 교회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가끔 교황이 강성하자 감독은 유럽을 다스리는 세속적 통치와 야합하였다. 힐더브랜드 (교황 그레고리 7세) (1073-1085)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교황 군대는 성 로마군대의 황제 헨리 4세와 싸웠다. 마침내 헨리 4세는 힐더브랜드에게 굴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 기간, 동방의 스페인과 북 아프리카에서 무슬림 영향을 제거하려고 십자군을 만들었다. 성전으로 불리는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을 두번씩이나 빼앗겼다. 동시에 침략적인 징기스칸의 이교 군대가 소아세아의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1232년부터 교회가 추구한 성경 보급의 최초 활동가이며 후기 개혁자와 버금가는 월덴시안과 로욜라는 이교들과 맞선 공권력을 가졌다. 위클맆은 그 시대의 개혁주의자를 인도하는 사람이었다.(1329- 1384) 위클맆은 교황 무오설을 비판했다. 성경이 믿음과 행함의 유일한 권위라고 가르치며 최초의 영어 성경 원고를 만들었다. 옥스포드 교수요 학자요 신학자인 위클맆이 교회 가르침에 대한 반대하는 소식이 유럽에 알려졌다. 그의 동료들인 로욜라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영어성경 12권의 복사판을 발행했다. 그는 그 원고를 라틴 벌게잇 역의 유일한 원문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교황은 위클맆의 가르침과 그의 성경 번역에 대해 너무 격노하여 위클맆의 사후 44년에 그의 무덤에서 뼈들을 파내어 부수어 그것을 강물에 뿌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