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는 자기 생명을 잃었다.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한 사람으로 정죄되어다. 겸손하면서 간혹 소심한 사람인 이 순교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인용되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16세기는 영국사에 가장 종교적으로 위험한 때였다. 생존을 위해서는 군주의 변덕에 의존하면서 카멜레온 처럼 색깔 변화를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의해 사로잡혀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감행해야만 했다. 존 블레포드를 위해 그 희생은 정부의 약정된 지위와 마침내 그의 생명을 드려야만 햇다.
블래포드는 한 부자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비지네스와 법의 훈련을 받았다. 그의 기술은 유명한 헨리 8세의 정부를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남자 상속자를 위한 헨리의 요청은 로마 캐톨릭과 결별하게 되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내들을 죽이거나 추방시키게 했다.
런던의 한 법학도로 있던 블래포드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곧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려고 갔었다. 왕 에드워드 6세의 짧은 통치기간 1550년에 교목으로 안수를 받았다. 한번은 블래포드가 교수형을 당하는 죄수들을 돌보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 자신의 최종적인 죽음의 때를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1553년 에드워드는 죽었고 메리 왕정이 들어섰다. 피흘리는 메리로 알려진 그는 영국을 캐톨릭 교회로 돌이키려는 수고로 300명 이상의 순교자들을 내었다. 어떤 설교자 혹은 고위 성직자는 돌아갔고 많은 사람이 타협했다. 그러나 블래포드는 메리가 그에게 이교파간 영웅 약조를 체결했다.
메리의 등극 원년 어느 더운 8월의 일요일 그녀의 충성스런 배스 감독은 최근의 몰락하는 왕에 대해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군중은 분노하며 위협적이었다. 한 청중이 감독에게 칼을 던졌으나 맞았지만 상처는 입지 못했다. 그 때 블래포드가 나타나 군중은 조용하였고 그들에게 질서를 촉구했다. 자신의 위협 속에서도 공포에 질린 감독을 보호하며 피신시켰다. 3일 후 블래포드는 난동으로 체포되었다.
2년 동안 블래포드는 습한 영국 감옥에서 설교하며 글을 쓰며 살았다. 그의 말이 너무 신실했기 때문에 간수들이 밤에는 그를 석방하여 날이 밝기 전까지 돌아오도록 허락했다. 그는 항상 그렇게 했다. 마침내 허물을 찾기로 결정한 교회재판정에 의해 조사하기 위해 취조관은 여왕의 선처를 받아드릴 여부를 물었다. 블래포드는 대답하기를 “나는 생명이신 은혜의 주님께 대한 나의 의무와 일치한 호의에 대해서는 왕의 호의를 기뻐하지만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어떤 고통의 죽음보다 더 나쁩니다.”고 말했다.
당대의 그 위대한 설교자는 1555.7.1 화형장으로 끌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를 둘러싼 군인들에게 그 동안 그릇된 행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막대기를 주워 입을 맞추었다. 그는 한 젊은 죄수와 함께 화형대에 묶여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형제여 위로가 있을 지어다. 오늘밤 주님과 함께 즐거운 만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네, 거기서 우리의 모든 고통이 평화로 바꿔지고 우리의 싸움이 기쁨의 노래로 변할 것이네.”라는 확신 찬 말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