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저스 (John Rogers Ca. 1500-1555)

목숨은 캠브리지 대학의 성공과 명예의 줄이었고, 런던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 교구목사의 생명줄이었다. 즉, 영국 왕이 죽기까지 로저스는 한 여왕을 등극시키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응했다. 목사며 성경편집자로 열 한명 자녀의 아버지인 존 로저스는 메리 여왕 때 최초의 희생자였다.

1534년, 로저스는 앤터웦의 영국 상인들의 목사로 인정을 받았다. 거기서 아내를 만난 로저스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 회복이 하나님 진리의 최 우선순위임을 확신시킨 윌리엄 틴데일과 절친한 사이였다.

죤은 개신교도가 되었고 헨리 8세의 명으로 최초의 성경편집인 마태복음을 만드는데 협력했다. 앤터웦 출신인 로저스는 교회를 목양했던 비텐베르크로 가 유럽을 휩쓸었던 개혁 교리를 연구했었다. 1548년, 로저스는 에드워드 6세가 개혁을 환영하자 영국에 돌아왔을 때 리들리와 클레머같은 지도자들이 새 시대를 위한 크리스챤 예배의 새 지침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에드워드의 죽음과 메리 왕조의 출현으로 무산되었다

1553년 8월, 로저스는 지도자요 개혁자의 생애로 변화되었다. 첫 달에 그는 “교황의 우상과 미신”에 대해 설교했다. 이것은 영국교회의 장래에 대한 메리의 이상에 직접적 도전이 되었다. 그 설교를 통해 죤은 조사를 받았고 가택 연금이 되었다. 목사와 교구목사로의 임명은 끝이 났고 교회 당회는 해산되었다.

6개월 후, 런던의 새 감독은 로저스를 뉴게이트 감옥으로 옮겼다. 메리는 그녀의 “강경조치법을 통과하기 위하여 의회 소집을 준비하고 있었고 집행관들은 다가올 법 규정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쁜 교훈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로저스는 문제없이 뉴게이트에서 1년을 기다렸다. 그 때 1555년 1월, 그를 메리의 꼭두각시인 윈체스터의 스테판 가디너 감독 앞으로 데려왔다. 가드너는 로저스가 성찬의 포도주와 떡의 본질을 부인함으로 이교도라고 정죄했다. 그 때 의회는 이교도를 처벌받아야 한다고 공포했기 때문에 로저스를 화형에 처하게 했다.

사람들의 처우는 매우 잔인했다. 죤은 자기 아내와 함께 한 모임을 요청했으나 기각을 당했다. 그는 그 교훈을 철회하고 부인하라고 강요당했다. 마침내 그의 고집과 무례함의 빌미로 그의 생명이 단축되었다. 2월 4일에 로저스는 형틀을 메고 형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자녀들은 그가 죽으러 나갈 때 군중의 행렬을 따랐다. 그의 가장 어린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있었다. 그날의 엄위를 본 모든 사람들은 그 길을 힘있게 가라고 그를 격려했다. 죤의 마지막 대화가 이것을 참되이 증거한다.

– “당신이 성례의 악한 이론을 철회하겠는가?”고 집장관이 물었다. “내가 설교한 바는 내 피로서 보증할 것이다”라고 로저스는 대답했다.

– “그렇다면 당신은 이교도다.”라고 집행관이 소리쳤다. “심판 날에 그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고 로저스는 그를 응수했다.

– ”너를 위해 기도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집정관이 말을 끝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불꽃이 타오르기 전 바로 그 순간에 로저스는 이렇게 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