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 (James the Less AD 63)

돌탕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가 따라야할 좋은 본을 남겨 놓았다. 그의 순교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트리오 야고보”가운데 알패오 아들 야고보(혹은 작은 야고보)는 가장 작은 프로필로 되어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간단한 질문, 설명 혹은 행동에 대해 별로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야고보는 이상했거나 칭찬받은 일도 없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큰 야고보)와 제자 중 번개의 아들 중 하나로 알려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리더쉽을 가진 예수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 시대에 탁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을 알려진다. 그러나 알패오 아들 야고보는 그 이야기 배경 속에 살았을 뿐이다.

어떤 점에서 사도들은 전도를 위하여 세계 지역를 제각기 배당받은 것으로 전통은 알린다. 시리아는 작은 야고보가 맡은 구역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크리스챤 박해 초기에 유명한 도피처 중 하나가 시리아 남부의 다메섹이었다. 사울이 신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시작하자 체포할 수 있는 크리스챤들이 다메섹에 집결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세우셨다. 핍박의 목표였던 다메섹 사람들이 그 도시에 오는 길에서 예수를 대적하던 사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완전한 복종이 성취되지 않은 것 때문에 박해가 시작되었다. 결국 바울의 담대한 모본과 특별한 사명에 관해 예루살렘에서 잡힌 베드로와 빌립 같은 인물의 계승으로 부실한 활동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되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 저렇게 실현되었다.

시리아를 향한 야고보 전도에 세 사람의 청중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아나니아 같은 신자들을 낳았다. 그가 사도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을 환영하였고 야고보를 문제의 사람으로 생각한 유대인들을 돌이키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 관대한 사람이 주요 상업상 전형적 문화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분명히 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설교를 거절하고 그를 돌로 쳐 죽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죽은 후 얼마 안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 감독으로 그를 임명했다고 전해진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라고 권했다는 말이 알려진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장소가 성전 꼭대기로 알려진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담대히 선포했다.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했다. 야고보는 땅에 내동댕쳐지고 돌 탕이 그에게 날아왔다. 그러나 돌은 그의 다리만을 부러지게 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기를 치는 사람들을 향해 무릅 끓어 기도하기를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고 했다. 그때 그의 목이 침을 당하여 죽임을 당했다.

야고보는 동방을 향한 복음 확장에 공헌했다. 결국 예루살렘과 다메섹을 서쪽과 고대 이라크 동쪽과 연결된 무역 루트가 열리는 먼 거리로 교회의 팔을 뻗치게 했다. 그 복음은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 인디아을 통해 먼 동쪽까지 전파되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