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틴데일 (1494-1536)

진리를 알고자하는 우리의 열정이 너무 크기에 어떤 구도자들은 확실한 한 가지 보화를 알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조차도 바치게 된다.

윌리엄 틴데일은 영국의 교육과 진리의 원천이신 성경간의 괴리를 바라보고 실망한 지식인이었다.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에서 연구한 그는 장벽에 대항하는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성장하기를 갈망했다. “대학 8-9년의 세상학문을 심취하기까지 어느 사람도 성경을 읽고 취임된 일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틴데일의 생애는 그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몰두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이 그들이 편견과 선입견 없이 그리고 어떤 사제의 도움 없이도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 진리 자체로부터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틴데일은 1494년경 웰취 접경에 있는 영국의 글로우시스터에서 출생했다. 90년 초기 교회는 쟌 위클맆이 손으로 기록한 유일한 영어 성경 한권만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라틴 뻘게잍에 근거한 진부한 번역이었으나 모든 영어권 사람들은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갖는 것은 범죄였다. 그 위험한 세기에 마침내 틴데일은 영어세계의 사람들이 그것에 근거하고 배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전으로부터 정확하고 쉬운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 일을 하기 위하여 틴데일은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를 보호할 감독도 또 그 일을 격려할 사람도 없었다. 1525년 틴데일은 신약을 완성시키려고 독일로 갔다. 그 때 그는 영국인 감시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 앤트웦에 가서 구약의 첫 다섯 권을 번역하고 인쇄했다. 벨기에에서 영국 상인들을 만난 틴데일은 감시인들을 안심시킬 충분한 보장책을 강구했다. 그의 부주의한 경계가 죽음을 자초했다.

틴데일은 헨리 필립과 친구였다. 그는 틴데일의 신임을 받았지만 감시인들에게 제공할 뇌물을 은밀하게 구했다. 1535년 5월에 그는 그 함정에 걸렸다. 부르셀 가까이 있는 빌부데 성에 감금되어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고 죄사함을 받으며 복음의 자비만이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교훈을 주장했기 때문에 재판을 받기 전, 18개월간 습지와 추위로 고생해야만 했다. 유죄의 완전한 목록에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동정녀와 성자들을 우리와 달리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의 내용도 들어있었다.

틴데일은 이 재판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잘 알았다. 그는 방어할 기회도 없이 사형이 확정되었다. 추워 떨며 글을 쓰기위한 희미한 불빛아래 동정하는 한 간수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영어성경을 완성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1536년 8월 틴데일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서리를 맞았다. 2개월 이상 그는 빌부데에 감금되었다. 10월초 늦은 새벽 그는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갔다. 집행관이 그의 손으로 한번 더 미사를 집전하려 하자 틴데일은 재빨리 손을 낚아챘고 마지막 몇 분간 취소할 기회가 주어졌다. 항상 그랬듯이 이교도를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이 몰려왔다.

형틀에 묶여 덤불과 장작더미에 둘러싸인 틴데일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 때 집행관은 로프를 힘있게 당겨 타오르는 불길에 그의 몸을 태웠다.

그의 마지막 기도가 난폭한 왕, 헨리 8세를 위한 것인데 그는 아들 상속자를 위하여 앤 보리를 죽이고 캐더린과 결혼했다. 권세와 위세로 가득 찬 왕의 눈이 틴데일의 영어 성경에 쏠릴 줄이야!

정말 성경이 일했다. 틴데일이 죽은 2년 후, 헨리 왕은 틴데일이 그렇게 심혈을 쏟은 마태복음을 보급하도록 승인했다. 1539년에 모든 인쇄업자들과 판매업자들이 “우리의 언어인 영어로 된 성경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보급하라”는 명령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틴데일의 꿈과 그의 마지막 기도는 성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