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윈더비 (1401)

죤 위클맆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일을 행하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행한다고 주장했다. 1380년 위클맆은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로욜라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고대형식과 과거 권력과 특권에 안주하여 무너진 보증과 의식에서부터의 참된 회심과 갱신을 추구하는 믿음을 배우고 연구하고 전했다. 1384년 위클맆 생애에 위험이 닥쳤다. 존 위클맆이 죽고 44년이 지난 후, 교황은 그의 뼈를 파내어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했다.

그 대신 로욜라파들이 그 일을 수행했다. 윌리엄 스윈더비는 위클맆을 열심히 옹호했던 자 중 하나이며 유능한 설교자 중 하나로 인정 을 받았다. 그의 일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위클맆 사후 5년 동안그의 일치운동의 효과가 교회 공직자의 관심을 끌었다. 스윈더비는 리컨디오세에서 사제로 있을 때 다시 성경 교훈을 유포하지 말라는 공직자의 명을 받고 그들이 운반한 나무로 태워져 재가 되지 말라고 위협했다.

그 위협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빠르게 침묵했지만 스윈더비는 말하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1392년에 계속 일하는 사제에게 리챠드 2세 왕에 의해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스윈더비에게 알려지자 그는 심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세례, 교회정책, 행정 구원과 성례에 관한 문제를 지적했다.

두번째 체포와 1401년 런던에서 참혹한 화형을 당할 때까지 9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 해 일어난 일에 관해 사람들은 말하지 않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에 스원더비의 마음과 정신은 성경만이 근본적 교훈 즉, 구원의 길 (하나님의 자비가 인격적 믿음에 나타난다)이 크리스챤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는 오랜 고문을 받았지만 그의 정직과 양심이 결코 바라지 않는 소망으로 둘려 쌓이게 할 수 없었다. 또 그 고통의 날이 다가왔을 때 그는 그것만이 신실한 생활의 보상이며 앞으로 오는 생애의 소망이었음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