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와 함께 가정예배

작은 죄 (암1:1-8) 찬 495장

웃시야와 여로보암의 경제적 부요와 함께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어수선한 때, 하나님은 드고아 목자 아모스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가 받은 일은 경고의 메시지로 그들을 회개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어떤 경고를 받았습니까? 이방의 다메섹(3-5), 불레셋(10)을 향한 심판 메시지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권위를 꺽기 위해 강국의 침략으로 사로잡히고 불로 망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존폐가 달린 심판이기에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 둘째, 심판 원인은 작은 죄 때문입니다.(6,9,11) 우상숭배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경외가 없는 모든 것이 죄의 근본입니다. 작은 죄라도 하나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나온 주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 통해 들려오는 세미한 주의 음성를 듣고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 가장 복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암1:9-15) 찬184장

두로와 에돔과 암몬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 속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형제 계약을 배반한 그들을 원수에게 팔아 넘긴 죄입니다.(9) 형제 약점을 이용하여 원수에게 붙이는 인신매매 같은 죄를 경계해야합니다. 둘째, 형제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 때문입니다. (11) 도망가는 형제를 칼로 죽이는 맹렬한 분노를 버려야합니다. 셋째,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무자비한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죄입니다.(13)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무자비함으로 욕심을 채우는 죄를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만합니다. 이방에 대해서도 이렇게 심판하신다면 자기 백성에 대한 형제 사랑의 결핍은 더 큰 심판이 따릅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산 형제의 연약을 대신 담당하는 사랑을 표현합시다.

경건의 회복 (암2:1-8) 찬 394장

하나님은 모압과 에돔의 죄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더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

첫째,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은을 받고 의인을 팔 정도로 의를 경홀히 여겼으며(6)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가 학대를 당하며(7) 부자가 경건으로 가린 탐욕과 외식이 만연한 사회였습니다.(8) 더욱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너진 사람은 자연히 이웃 관계의 도덕적 부패가 일어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시킨 더러운 영(계16:13)은 우리 시대에도 크게 일하고 있습니다. 둘째, 어떻게 이깁니까? 경건 회복만이 살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에서 돌보는 참 경건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약1:27) 경건 회복을 위해 힘씁시다.

죄의 보응(암3:9-15) 찬338장

북 이스라엘의 중심, 사마리아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세 가지 죄악 즉 요란과 학대가 있었고(9) 약한 자를 억압하는 팽배한 강포와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무시되었고 포학과 겁탈이 난무하여(10)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려는 탐욕이 가득 찼습니다. 더욱이 죄악의 뿌리인 우상숭배가 팽배하여(14) 도덕적 부패가 충만했습니다. 둘째, 그들을 대적에게 넘기어 수치를 당케 하시며(11) 벧엘의 제단을 헐어버리려고 불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14,15)

세상 심판의 서곡인 이스라엘 심판은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이뤄질 세상 심판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계16:17-20)

하나님 사랑의 능력 (암4:1-13) 찬416장

죄의 결과로 가뭄, 흉년, 병충해, 염병 그리고 전쟁 참화의 징계를 왜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까?

첫째,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의 여지를 남기셨습니다. 사랑받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 자신의 연광을 위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구원도 우리 공로가 가미되지 않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만 됩니다.(엡2:8-9)

둘째 회개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탕자가 아비를 떠나 허랑방탕하여 비로소 궁핍하여 돌아왔을 때 상상을 초월한 은혜를 받았듯이 주께 돌아오기만 하면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그 사랑의 힘으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롬5:5)

이 크신 사랑 안에서 참된 능력을 누립시다.

회개와 믿음(암5:1-17) 찬 337장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제나 별 다른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경고와 아울러 갈 길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첫째, 회개해야합니다. 신부가 신랑을 맞아할 준비를 하듯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하는 것이 회개입니다.(4-6) 이 회개만이 생명을 얻게 합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위시하한 여러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골자였으며 예수님 복음의 내용입니다.(막1:4, 15) 통회하는 마음이 신자가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둘째, 믿어야합니다.(14-15) 참 회개는 반드시 참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믿음만이 회개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믿을 때 회개할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에 대한 믿음(행20:20)을 전한 바울 복음은 그 뿌리가 깊습니다. 이 복된 길에 들어선 우리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언제나 복음의 빛 아래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 (암5:18-27) 찬342장

무서운 경고를 듣고도 회개치 않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것이 둘이 있습니다.

첫째 공법(justice)을 원하셨습니다.(24상)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실패한 이스라엘은 모든 일을 그르쳤습니다. 사회의 공법이 무너짐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문제 때문이란 것입니다. 도미노현상처럼 하나님에 대한 계명(1-4)에 바로 되지 않으면 이웃 계명(5-10)도 세워질 수 없습니다. 공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합니다. 둘째, 정의(righteousness)를 원하셨습니다.(24하) 이스라엘의 구원의 의는 모든 사회 정의의 기초입니다. 의가 무너진 가정과 사회는 믿음의 의를 잃은 증거입니다. 이 의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앗스르 의 포로 생활의 쓴 맛을 허락하셨습니다. (25-27)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얻은 신자의 의가 생활 저변에 강같이 흐르도록 작은 일에서부터 의를 세워야합니다.

자만에 대한 징벌 (암6:1-14) 찬 347장

하나님의 요구하는 공법이 쓸개와 정의가 인진으로 바꾼 이스라엘의 죄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12)

첫째, 안일한 마음에서 나왔습니다.(1)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열방을 의지한 저들의 평안은 일시적인 것이며 결국에는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요셉의 환난을 생각지 않고 자기 탐욕만 채우는 원수의 발아래 떨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위험한 것이 수동적인 마음, 영적 게으름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자만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 힘을 의지하는데서 나왔습니다.(13) 우리의 뿔을 우리 힘으로 얻었다고 자화자찬하게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이 자기 신뢰로 나가는 것은 영적법칙입니다.(롐17:5-6)

“주여, 내 마음을 겸손의 영으로 채워주소서!”

먼저 의를 구하자 (암7:1-9) 찬 265장

본문에 보이는 세 가지 이상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새싹을 싺슬이 한 황충이 이상에서 약한 이스라엘을 향해 뜻을 돌이키시는 긍휼을 보였습니다. 진노 중 긍휼이 남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때문입니다.(히4:15-16) 둘째, 타오르는 불 이상에서 바다를 삼킨 불이 땅까지도 사르려는 심판의 맹렬함에서 뜻을 돌이키심은 선지자의 중보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그러나 다림줄 이상에서 측량하신 제단의 주님은 우상숭배의 죄를 징계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의 집을 칼로 치리라는 예언대로 그 나라는 앗스르의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보인 그의 의를 세우시는 열심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주 안에서 거저 얻은 의를 따라 그 의를 세웁시다. (마6:33)

소명의 본 (암7:10-17) 찬350장

주의 부르심은 사역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소명이 없는 사람은 주의 사역을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부른 자만을 통해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부름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그는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복방 이스라엘 초기, 목자며 농부인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자 즉시 응답하였습니다.(14-15) 하나님 부르심은 절대적 효력이기 때문에 아무도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응답하는 사람도 자원해서 응한 것은 마음의 변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마4:19-20) 둘째 사명에 충실하였다. 구원을 위한 부르심에는 사역에 대한 부르심도 포함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관한 회개와 경고를 알리는 예언이기에 핍박을 예상하겠지만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소명 문제가 점점 소홀히 되는 이 시대에 아모스의 사역을 본받아 부르심을 굳게하는 신자가 되어야합니다.

진정한 문제 (암8:1-14) 찬340장

여름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심으로 이스라엘의 종말이 어떠함을 알려주셨습니다.(1-2)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가난한 마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4) 소자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팎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경건의 분위기는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으며 인간 존엄성이 사라진 부패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둘째, 말씀 받을 수 있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11) 양식과 식수의 기근도 심각하지만 말씀의 기갈이 더 급함을 아모스는 탄식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생명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요6:63) 말씀을 잘 받는 옥토에 100배의 결실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경홀히 여기고 일락과 물욕과 염려로 채워진 가시나무 마음이 우리 시대의 문제입니다. 성경마저도 인간 말로 취급하기 좋아하는 치명적 위기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성경묵상의 세계로 속히 나가야합니다. (시1:1-3)

회복의 하나님 (암9:1-15) 찬 214장

마지막으로 보인 그림 계시는 기둥을 쳐서 문지방을 흔드는 이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첫째, 종말론적 경고를 봅니다. 2-4절까지 “내가”라는 말을 6회나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4) 심지어 심판을 결단코 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다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종말론적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8) 온전히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며(8) 황무한 성읍에서 건축하며 들판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14) 그리고 다시는 너희를 뽑을 자가 없는 근본적 변화를 약속하셨습니다.(15)

우리 구원은 첫 복음(창3:15)에서 약속한대로 하나님이 친히 시작하시고 이루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 분이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빌1:7) 이 약속을 주장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