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저스틴 (AD 100-165)

순교자 저스틴은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결코 로마 통치아래 잔인하게 죽을 것이라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시대에 교수형은 누구에게든지 이 세상에서 저 세계로 옮기는데 사용된 일반적 수단이었다. 마침내 한 로마 원로가 황제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냐 혹은 이교신에 대한 가장 간단한 경배냐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요구받을 때 황제에 대한 경의를 완전히 거절함으로 신실한 크리스챤은 정죄를 당한다. 저스틴이 그런 운명에 직면하여 선택을 요구받을 때 한 노인이었다.

저스틴은 사상과 토론과 논증에 열중한 학자였다. 현대표준에 의하면 사도 후 수 십년간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이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사마리아의 옛 세겜에서 성장한 그 총명한 소년은 로마와 헬라의 최고의 지성인 스토익과 플라토 문서에 익숙했다. 진리의 평화에 대한 갈증을 채우지 못한 그는 무명의 한 노인 증거에 응답하여 30세쯤 한 확실한 가치있는 사상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생애와 마음을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자기 마음으로 열심과 결단으로 그 진리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고대수사학으로 무장한 그는 복음의 유익, 메시야의 진리 그리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장래 심판에 관해 유대인과 이방인과 논쟁을 벌였다. 저스틴은 크리스챤의 믿음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일 곧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그리스도 부활이 두려운 죄의 심판에 대한 영 단번의 대답이었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바울 이후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로 알려졌다.

믿음 안에서 강하고 초기신학에 밝은 저스틴은 보편적 견해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는 기민하여 문화를 깊이 이해했고 오늘날의 사회학자처럼 자기의 역동적 세계와 타협하기 쉬운 그 시대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이교의 철학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기위하여 하나님이 이방 철학자에게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하여 진리의 빛을 주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섬광은 본질이 아닌 단지 맛보기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기 전 우주의 이성이며 로고스이신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오기까지 진리를 충분히 발견할 수 없다. 저스틴의 폭은 다른 그리스도인이 비기독교의 문화와 작품 속에서 진선미를 알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믿음에 대한 용기와 확신을 가진 저스틴의 변증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이시며 저급한 우상들과 타협하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

그는 크리스챤들은 비도덕적이며 유약하고 반대하는 배반자라는 폭넓은 개념에 분개했다. 그의 사역에 큰 부분은 믿음에 대한 사회적 유익을 묘사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본적인 시민으로 예찬을 받으며 권장되어야만 한다고 로마권력자들에게 증거했다. 그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선이 그리고, 이 크리스챤들이 나라에 가장 고상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로마 권력자들에게 “사실상 우리는 선한 질서를 보전하는데 당신들의 최상의 협력자들이며 단체입니다.”라고 하며 “그들이 거짓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바로 그 요구가 35년간 가르침과 설교를 행한 저스틴의 길을 확정했다. (그는 공식적인 교회직분을 주장하지 않았다.) 말쿠스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초기에 저스틴과 다른 여섯 사람이 붙들려 재판장 러스티커스 앞에 데려왔다. 물론 저스틴이 그 그룹의 연설자였으나 그의 고백과 방어가 시작되자마자 한 설교를 기대하는 재판관은 기독교를 거절하고 가이사에게 절하라는 중대한 요구를 했다. 모든 사람이 거절하자 러스티커스는 무자비한 말로서 소리쳤다. 이윽고 저스틴과 그의 제자들은 고문과 참수를 당하였지만 진리는 잠잠하지 못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자신의 목숨의 희생이 있고 죽음이 그를 취한다 할지라도 모든 일에 옳은 것을 선택하고 행해야한다.” 저스틴은 그의 첫 번 변증서 초두에 기록하기를 “당신은 우리를 죽일 수 있으나 우리에게 어떤 참된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