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치심 (The Spirit’s Sealing)

과거 20년 전만 하더라도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와 맞선 성령세례와 중생을 구분하는 오순절 교파의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장로교 신학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이단이라고까지 규정하는 움직임까지 일어났었다. 이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물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 견해에 위배가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언이 성령세례 받은 증거라고 하면서 사도행전의 사마리아와 에베소 교회의 경우를 들어 그 이론을 고집하여 혼란을 겪은 일이 있었다. 세월의 검증을 거친 오늘, 이 견해는 점진적으로 수용 되어 로이드 존즈의 “성령세례(Unspeakable Joy)”라는 책이 나온 이후부터 절충적 견해로 바꾸어졌다. 즉 성령세례가 중생이라고 보면서 그 후에 사역을 위하여 성령의 주권적 기름 부으심인 능력의 세례가 있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능력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며 사모하는 순서를 가져야하고 주장해야한다고 가르쳤다.

필자는 청교도 설교자들을 접하면서 그 시대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너무나 우리 한국 교회와 비슷하여 놀랐고, 그들이 더 앞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흔적을 보고 새로운 통찰력을 가진 일이 있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것이나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주장하는 것의 차이점은 서로 조화를 이 룰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몇 가지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관점의 차이일 뿐이지 서로 존중하여 공존해야 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실예로, 로이드 존즈는 엡 1:13절의 “성령의 인치심”을 성령의 중생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롬 5:5절의 하나님의 사랑의 부으심이 성령의 세례라고 주장한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여 설명함으로서 성령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청교도 설교자 리차드 시브스, 토마스 굳윈의 경우에는 신자 속의 성령이 주시는 내적 확신으로 본다. 이 인치심은 성령의 중생하심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활동하심보다 성령의 임재에 강조를 두고 있다. 이는 성령의 인치시는 일은 바로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 후 펄킨스(William Perkins)의 계승자인 바이어(Paul Buyer)는 이 둘을 절충하여 “성령과 성령의 은혜는 우리 구속의 인치심으로, 전자는 모든 신자가 소유한 인치심이고 후자는 성령의 은혜를 의식하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 한다.

필자는 이 절충안을 그대로 따르고 싶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구속에는 이런 성령의 중생하심으로 내주하시는 일이 필연적이고 또한 성령의 은혜를 의식하는 것은 우리의 사역 속에 분명히 일어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엄청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언제나 탄식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동일한 성령을 통하여 이 능력의 기름 부으심이 항상 우리가운데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사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