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변화산에 오르자

초대교회 원 사도인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서 주님과 함께한 변화산 황홀경 체험을 주님 재림의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한다.(벧후2:16-17) 갈릴리 어떤 산에 올라 주님께서 기도하는 중 감당할 수 없는 광채가 나오는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그 빛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꼬꾸라진 후,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노라고 요청한다. 갑자기 구름 속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성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 년이 지난 후, 사도는 그 광경을 가리켜 주님 재림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재림의 광경을 미리 맛 본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가? 삼층천을 체험한 바울처럼 베드로 역시 고이 간직하다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부득불 말한 것이다. 당대 유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의 거짓 교훈들이 교회를 어지럽혀 신자들이 이상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고 바로 잡아주기 위한 목적으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 기적과 표적 그리고 황홀경에 들어가는 체험을 중요시 여김으로 주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위험을 사도는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보다 가나안의 젖과 꿀에 치우쳐 표적 중심에 서 계신 주님보다 표적의 기이함과 경이로움에 쏠려 진리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며 그 연장선으로 주님의 재림을 불신함으로 현실에 흘러가는 세속의 가르침을 따라 표류하려는 삶이었다. 또한 율법적 크리스챤은 전통의 굴레에 매여 복음의 진수에 이르지 못한 외식의 삶이었다.

그 때 베드로는 또 다른 변화산을 보여준다. 이것은 확실한 예언으로 표현된 성경으로 나가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확실한 것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성경에 착념한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벧후2:19-21)

우리 시대의 교회의 문제가 베드로의 변화산의 체험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고 거기 또 다른 체험을 하기 원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변화산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정주의 지식주의 현실주의 인위주의로 더렵혀진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닌다. 사실 베드로의 영광스러운 체험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 체험이 성경 계시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더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싸워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참된 변화산인 성경에 오르자. 거기서 우리는 현실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배운다. 문제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본래의 복음의 능력을 내 것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성경의 변화산으로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