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각 장마다 먼저 사건을 보인 후 곧이어 그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드러낸다. 8장 초두에 나온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 지 않고 용서하시는 주님은 그 사건과 관련시켜 말씀하기를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가 빛이란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첫째, 그는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이다. 만물 창조 시, 처음 만들어진 그 빛은 해달별의 빛과 구분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빛은 만유의 근본이다. 모세가 그 사건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때 그 빛의 실체가 누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빛은 무엇이 아니고 누구이다. 복음의 빛아래서 그 실체가 밝혀졌다. 그 빛은 바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모든 생물, 무생물, 인간의 도덕과 윤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빛이시다. 더욱이 그는 현대인들의 모든 삶의 기반으로 삼은 과학의 뿌리며 기초이며 중심인 그 빛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어졌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골1:16) 그렇다면 한 송이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아름다움을 알 수가 없고, 어제 일어난 작은 교통사고도 그의 빛 아래서 해석 되어야 하며, 불경기 파도로 감원바람이 부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중심도 그리스도임을 간과하지 말아야한다. 그는 만유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생명의 빛이시다.(요8:12) 여기 생명이란 말이 중요하다. 죽음은 어두움과 절망을 남기지만 생명은 밝음과 소망을 일으킨다. 생물의 생명이 각기 다르지만 그들의 다양한 활동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공급되는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제껴 놓은 생명 활동이란 무가치하다. 오직 그 만이 생명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의 빛은 자기 백성의 죄를 처리하셨다. 현장에서 붙들린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는 절망적 정죄에서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빛, 예수가 대신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는 선포는 생명의 빛이 한 개인에게 비추어 치료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풍성한 치료의 강수는 계속 흐른다. 누구든지 그에게 믿음으로 가기만하면 이 치료를 체험한다. 생명의 빛 안에 거한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빛이기에 그 빛을 받은 자기 백성에게는 그 빛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있다.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엡4:)는 바울의 깨우침은 생명 빛의 열매가 바로 하나님 성품의 드러남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빛인 신자가 사모하는 열매이다. 진정 예수만이 영원한 생명의 빛이시다. 아니, 예수만이 나의 빛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