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갈망

부흥을 현대교회에 접목시키는 세번째 길은 부흥을 갈망하는 기도가 절실해야만 한다. 부흥을 구하는 간구는 하나님의 의에 주림과 목 마름(마5:6)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수순을 거치지 않은 부흥을 기 대할 수 없다. 에베소서교회의 부흥을 일으킨 바울은 그 자신 속에 부흥의 갈망으로 채워졌다. 전염병처럼 온 세상을 복음으로 채우기를 그렇게 원하였으며 복음 안에 약속된 모든 은사가 불일듯하기를 그렇게도 원하였다.(롬1:11) 그리고 에베소 교인들도 더 나은 은혜의 차원으로 나가기를 소원하였다. 일찍이 아볼로를 통해 율법을 중심한 복음을 들었으나 구체적인 복음을 접촉하지는 못하였다.(행19:2) 바울이 이것을 꼬집어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는 그들의 간단한 대답은 갈망을 포함한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할 때 즉시 강청한 것처럼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원한 것이다. 그들이 세례를 받고 사도가 안수함으로 12명 모두 오순절 날 120명에게 나타난 것 같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오순절 역사의 반복이 갈망하는 자에게 나타난 것이다. 부흥에 대한 갈망이 부흥의 소낙비를 몰고 온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이 그들 속에 부어주신 마음이다. 부흥의 주도권은 철저히 하나님이시다. 에스라의 부흥도 저들이 스스로 모여 금식하며 갈구할 때 나타났다. 그때 성령은 임하셔서 은사를 나타내시어 영광을 받으신다.

현대 교회에 에베소 교회의 부흥이 왜 필요한가? 한국교회, 이민 교회, 세계 교회는 진정한 부흥을 원하기 때문이다. 부흥 플랭카드가 왜 그렇게 많은지, 인터넷의 웹사이트 마다 부흥의 표어와 슬로건이 여기 저기 떠오른다. 디지털 텔레비죤으로 바꾼 후 모범적 교회의 예배 실황과 설교와 교육 프로그램들이 온 종일 홍수처럼 쏟아진다. 쌀 창고에서 굶어 죽는 생쥐처럼 부흥의 외적 분위기가 아무리 많아도 마음에서의 부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부흥을 갈망할 수가 없다. 필요를 모르면 간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의 소원과 갈망이 우리도 필요하다. 이 갈망이 현대교회의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갈망은 기도로 표현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취한 후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다. 구체적인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려는 노력이 일어날 때 갈망은 더해가고 기도의 불은 더하게 된다. 개인기도, 단체기도, 골방기도, 공중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등 등 모두 필요하다. 자기에게 맞는 것부터 찾아 부흥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리자. 내 속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한다. 성령은 이것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