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데살로니가 교우들처럼 복음을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자체가 능력인 복음을 내 삶에 적용할 때 다른 차원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바리새인처럼 외식에 빠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성능 좋은 컴퓨터를 구입했어도 다룰 줄 몰라 더 큰 난항에 빠지게 되는 것과 같다. 복음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리스도로 요약되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으로 확장되며 더 나아가 성경이 복음이다. CCC에서 오래 가르침은 4영리의 구조대로 복음이란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죄, 그리스도만을 통한 중보, 그리고 믿음의 인격적 영접의 결단이 될 때 비로소 개인에게 능력으로 나타난다. 죄사함과 성령받음과 영생얻음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당에 들어간 자가 된다. 3주라는 짧은 시간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변화시킨 것은 사도가 전한 복음이었다. 그 후 보낸 서신에서 사도는 어린아이의 양육지침처럼 그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며 다루었는가?

첫째, 그는 고난 중에서 복음을 전했다.(살전2:2) 이 유앙겔리온(복음)은 자기의 견해가 아니고 하나님 친히 위탁하신 메시지이다.(3) 전하는 자신이 복음을 알고 본을 보였다. 간사, 부정, 속임수, 아첨 그리고 탐심으로 전하지 않았다.(5) 복음 자체가 진실과 생명이기 때문에 진실의 그릇 외에는 그 어떤 그릇에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복음을 조직적으로 말하기를 인간은 모두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를 얻으며 그 의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이끌린 삶으로 전환되며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바 된 산 제물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가르친다. 일찍이 개혁자의 표어대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만 복음의 능력이 내게로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받을 때 변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능력의 복음이다.

둘째,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시킨다. 살전2:6에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한 사도의 확신은 복음의 시작이 하나님이고 방법이 하나님이고 열매 맺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피난처이며 반석이며 풍요이며 만족이다. 개혁주의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신학과 신앙체계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복음자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주에게로 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한 바울은 먹으나 마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한다.(고전10:13) 알고 보면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인생의 제일의 목적을 이루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

셋째, 그것은 본을 통해 증거되었다.(2:8) 어머니의 임신과 산고를 거쳐 생명이 출산되듯이 복음 전달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원리를 따른다. 기적을 좋아하는 시대가 무시하기 쉬운 일이다. 사도들의 본이 복음의 본을 만들었다. 제자가 제자를, 믿음에서 믿음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가듯이 사도의 복음의 삶의 본이 그대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목회서신에서 교회의 본(example)이 되라고 가르친다. 유모같은 유순한 권면, 아비같은 권면과 위로와 경계 그리고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우고 열심히 수고했다. 오늘날의 문제도 여전히 본이 문제이다. 경건의 본 은혜의 삶의 본이 없어 항상 문제이다. 교회의 본이 될 목사가 동성연애의 죄를 심상히 여긴다면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본이 되려는 꿈을 꾸어야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본을 통해 사도를 세우시고 사고의 본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본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활용할 때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빌4:13 사6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