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돌로매 / 나다나엘 (AD 70)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전파되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빌립의 소개로 예수께 나아온 바돌로매는 한 구도자였다. 예수에 관한 소식을 접한 바돌로매의 일차적 응답은 회의와 비꼬임 이 섞여있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0)”는 것이다.

그가 시몬을 만나기 전 예수는 바돌로매에게 예견된 도전적 말로 인사를 건내셨다. 예수는 즉각 그를 참으로 이해한 사실을 바돌로매에게 알리기를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을 보라)고 인사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바돌로매는 어리벙벙하여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는 말로 불쑥 말을 내놓았다. 예수는 그의 중심적 충동을 밝히셨다. 그는 보충할 필요가 없이 완전히 그를 아셨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에 호기심을 가졌다. 예수는 빌립이 그를 찾을 때의 장소를 묘사함으로 응답하셨다. 빌립이 예상한대로 예수의 생각은 바돌로매를 확신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상 그 분은 바로 약속된 그 분이셨다. 그는 말하기를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1:49)라고 말했다. 예수는 바돌로매의 고백를 받으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더 많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는 약속해 주셨다.

바돌로매는 예수의 광야 경험 후 얼마 안 되어 그를 따르기 시작했던 5사도 그룹 중 하나이다. 그는 세례요한에게서 예수 제자가 되려는 움직임 속에 안드레, 요한, 시몬 그리고 빌립과 합류했다. 우리는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란 그의 두 이름을 안다. 그는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12제자의 이름에 바돌로매로 언급되었다.(마10:, 막3: 눅6:) 예수가 부활 후 해변에 아침 식탁을 준비하실 때 고기 잡으러 간 7제자 그룹의 일원에 나다나엘로 명시되었다.(요1:21) 바돌로매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복음서 기록에 어떤 행동이나 어떤 말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거기서 지켜보고 듣고 따랐다. 항상 먼저 말히기를 좋아하는 시몬 베드로보다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과 함께 관찰하고 배우는 것으로 만족했다.

바돌로매의 사도적 직분은 유다인 다대오 사역과 연결되어있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전파를 위하여 아르메니아로 간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인도보다 훨씬 먼 동쪽으로 여행하여 흑해와 카스피안해 사이, 팔레스타인 북동쪽 땅, 아르메니아에서 사역했고 거기서 순교한 것으로 전통적인 역사는 말한다.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면서 반복적으로 알려질 때 그리스도 메시 지를 전한 사람들의 효과의 직접적 결과로 그들은 생명을 잃었다. 선 을 행하면서 비교적 평화로울 때도 신자들은 잔혹한 핍박을 받았다. 가끔 세상과의 타협의 요구는 예수께서 받은 것과 같았다. 단순히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메신저로 사라지는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실을 안전이나 성공과 같이 생각하고 그것을 갈망하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데도 별 다른 고난이 없다. 그리스도의 가장 효과 적이고 신실한 종들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이 선한 복음으로 접근한 사람들에 의해 경멸과 거절을 당하면서 주인과 같은 고난을 당했다.

바돌로매의 영향으로 복음은 이교의 강한 지도자들 외에 아르메니아 인 모든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그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그들 신앙 시스템의 파문으로 생각해서 마귀적인 핍박의 강도를 높였다. 그들의 능력은 다대오와 바돌로매에 의해 전파된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될 수 없었다. 고위층의 신자들이 성경의 예수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교회는 급성장했다.

그 때 제사장들이 그들 신념의 권력과 조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왕의 동생과 연락하게 되었다. 교묘한 조치로 바돌로매는 체포되고 체형을 받았다. 사람의 가죽을 채찍으로 벗기는 참혹한 학대를 당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로 나아갔다. (어떤 이는 목이 땅에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르메니아에서의 바돌로매의 효과적 사역의 역사적 증거 중 하나는 성지와 아르메니아 전통 사이에 분명히 연결되었다고 전한다. 성지 순례자들은 사도적 시대에도 알려졌다. 성지의 성경지명이 과거 수세기전 아르메니아 신자들에 의해 세운 성소와 교회에 의해 오늘날까지 그 특징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