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종말론-백보좌 심판

마태의 종말론은 마태 개인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모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종말론이고, 구원이 완성되는 독특한 시대로서의 종말론으로 그 날을 사는 백성에게 종말을 사는 지혜를 주며 완전 세계에 들어가는 지혜를 배우게 한다. 예수님의 종말론은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유다와 야고보의 종말론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재림 직전의 영적긴장을 가져야하고 충성과 경성, 양 기둥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계시의 세계를 사모하고 그 일에 시간을 드려야한다. 베드로의 권면대로 그 날을 사모하고 현실의 경건한 충성을 힘쓰다가 주를 맞이해야 한다.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힘쓰고 최고의 경건을 가지고 최고의 자세로 대비하고 현실의 삶에서 그를 세우는 일 곧, 하늘 상급에 초점을 맞추어 열심으로 줄기차게 나아가야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할 최선의 일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백보좌 심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체를 말할 때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계21:13) 현재 살아있는 자와 물이나 불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 심판받는 것을 마태 25:31-46절은 양과 염소의 비유로 종말 비유들을 종합하셨다. 지금이 심판 직전의 시간이고 종말을 잘 준비하는 최선 의 기회라는 영적 긴장감을 갖게 한다. 그 비유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첫째, 심판의 기준은 행함 있는 믿음이다. 34, 41절에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된 소자에게 한 것을 주께 한 것으로 인정하셨다. 마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행함으로의 구원이 아니고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 뿐 이다. 바울과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사건을 가지고 제각기 참 구원을 가르쳤다. 행함 있는 믿음 혹은, 믿음 있는 행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 이 둘은 상충 되지 않고 상호 의존함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서로 견고하게 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행함으로 표현되는 산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이 심판은 두 세계로 갈리는 분수령을 이룬다. 32절에 양과 염소로 각각 구분하여 심문했다. 오른편처럼 왼편에도 같은 심문을 했다.(34, 41) 46절에 영생과 영벌,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진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26) 에도 보기는 해도 서로 갈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는 천당과 지옥의 구분을 말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1) 전도해야한다. 가족 구원을 책임져야하고 우리 사회도 구원해야 한다. 2) 그리고 선교해야한다. 전인구의 99%가 불교인인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 한 가족이 교회당 하나씩 세울 목표를 가지고 품고 기도할 수도 있다. 1400만 캄보디아 백성과 40만의 공장전도의 복음화의 꿈을 안고 기도하기를 도전한다. 선교사를 보내라. 아니 자신이 선교사로 가라. 자기의 모든 재능과 물질을 동원하여 문이 닫히기 전에 최선을 다해 순종함이 복되다. 바로 지금이 기회이다.

셋째, 영원세계에 넉넉히 들어갈 자로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그 세계의 참여 중대한 일이다.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준비해야한다. 구원의 확신에서 더 나아가 넉넉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인자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버린 자는 이 땅에서도 백배나 받고 영생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따라 복음전파에 집중해야한다.( 막10: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