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Mark AD 64)

기대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성경 기록의 특징을 보여주며 복음 전파가 아주 힘들 때의 사건 기록을 유머스러운 정직으로 표현한 사람이 있다. 마가 요한으로 알려진 마가는 예수님이 잡히심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묘사할 때 14장에서 미묘한 노트를 남기면서 복음서를 기록한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14:51-52)

우리는 예수님 사역에 대한 베드로 설명에 근거한 전통에 의해 자기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 요한의 자격을 정당화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사건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집이 초대교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이 젊은 제자를 증인으로 삼게 했다. 마가복음에 쉴 사이 없이 계속 따라붙는 공식(그는 “곧” 이란 말을 좋아했다)을 가진 사건을 말하려는 젊은이의 조급한 성격은 화술자의 모든 행동과 관련된다. 마가는 그가 기록한 사람들을 잘 알았다. 그는 모든 사건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참여자를 아는 개인적 지식이 그 복음의 저자임을 보여준다.

예수의 부활 때, 한 젊은이로서 마가는 앞선 사람들보다 더 장수하였다. 그의 배우려는 열심이 사도행전에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다. 마가의 외삼촌 바나바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초대교회 인물로 잘 알려졌다. 바나바는 마가를 처음 데려온 사람이고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1차 전도 여행시 짧게 그와 동행했다. 비록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에 의해 특별한 보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요한을 조력자로 두었다.”(행13:5) 초기 여행 때 길에서 생긴 난관과 부담과 고통은 마가와 관련을 갖는다. 그들이 터어키 남단의 밤빌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행13:13)

마가의 출발은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이슈가 되어 바나바와의 동역이 결렬되게 했다. (행15:36-40) 바나바는 주장하기를 마가에게 다른 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바나바는 바울 보다 마가의 성격을 더 잘 알고 있었다. 훗날 바울은 마가의 능력을 감사하는 표현함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 (골4:10, 딤후4:11, 몬 23-24) 바나바와 동행한 후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다. (벧전5:13) 이런 여러 미숙한 여행으로 에루살렘에서 안디옥, 바벨론, 로마까지 갔다..

그때 베드로와 바울은 순교 당했다. 마가는 그 자신의 일에 유능한 전도자였다. 그는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와 관계가 깊어 거기서 교회를 세워 양육하는 일에 도구가 되었다. 가끔 생기는 일처럼 그의 증거는 예수를 증거는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는 이방 종교 때문에 큰 장해물이 되었다. 마가가 표적이 되었다. 집행하기 전 수년 동안 마가는 로프에 묶여 알렉산드리아의 시장 거리에 끌려 다니면서 조롱과 상처와 해를 당했다. 감옥의 어느 날 밤에 마가가 죽기까지 같은 체형이 가해졌다. 군중이 마가의 몸을 불에 태우도록 요구할 때 폭풍이 생겨 집행이 늦추어지다가 다른 크리스챤이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하여 유골이 남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