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Thomas AD 70)

베드로와 바울을 제외한 다른 사도들보다 도마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있는데 대부분의 정보가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의심 많은 제자라는 평을 듣는 도마는 믿음에 대한 고대의 전통을 만든 자 가운데 하나로 여러 지역에 그의 이름이 거론된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내용이 도마에 관한 가장 큰 빛을 던져주지만 그것은 예수의 사역의 마지막 수 주간에 된 일이다. 분명히 그의 성품은 반대의 억압가운데 생긴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기다리며 예민한 위험의식을 느낀 도마는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말할 때 그들의 모든 마음도 그래야 된다는 태도로 소리쳤을 것이다. 아마 다른 제자들보다 태도가 더 분명했던 도마는 예수를 지도자로 삼는 한 나라에 관한 소망이 예수의 죽음으로 낭패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 어떤 제자들을 혼란에 떨어 뜨렸고 도마에게는 더 큰 혼란에 넣은 것 같다.

도마에 대한 우리의 다음 빛은 예수께서 아버지 집의 위로에 관한 말씀을 하시던 마지막 만찬의 자리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14:5)”라고 내 뱉을 때 도마의 마음은 정말 갈등가운데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도마의 담대함 대문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으로 예수님이 그의 주와 구주로서의 역할에 관한 가장 분명한 주장 중 하나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6:6)는 진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도마의 세 번째 모습은 부활하신 일요일 저녁(안식 후 첫날)에 나타난다. 예수는 도마가 없는 자리에서 일요일 저녁에 10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소식에 대해 다른 제자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모였으나 도마는 오지 않았다. 예수의 방문을 알았을 때 도마는 크게 의심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5)”

주일 후 다시 모였을 때 예수는 그들 모두에게 나타났고 도마의 의심은 사라지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고 고백했다. 예수는 성경의 믿음에 관해 다른 중대한 말씀을 해주기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20:29)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 가운데 일깨우신 열심은 그들로 하여금 특권을 가지지 못한 수천의 사람들에게 복을 전하도록 이끌었고 자기 삶을 이 확신에 놓았던 자들은 그들의 증거를 믿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예루살렘을 떠난 도마가 돌아온 증거가 없다. 그는 의심에서 벗어나 땅 끝까지 갔다. 그는 예수께서 끝까지 자기와 동행하는 사실을 믿었다.

도마는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있는 바벨론과 페르샤를 통해 인도의 남부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로마 통치영역을 벗어나 멀리서 복음을 전한 것이 오랜 전통 이야기로 남아있다. 단순히 우화로 생각된 도마와 관련된 지명과 왕들은 역사와 고고학연구로 확실하게 되었다. 분명히 발전된 문명은 동쪽 지평선 저 멀리 일어나고 “땅 끝”이란 예수의 말씀은 사도의 마음에 끊임없이 메아리쳤을 것이다. 그가 이용한 무역 루트는 수 천년 동안 존재했다. 16세기 포루투칼의 광산 발굴자들의 도마사역의 증거 보고에 성 도마 크리스챤으로 알려진 신자 무리를 포함하고 있다. 도마가 사도 가운데 독특하게 인도와 관계된 사실은 거기서 그의 사역이 이루어졌다는 강한 증거이다.

도마순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그의 성공적 사역을 시기하고 그의 메시지를 거절한 힌두교 제사장들과 충돌하였다는 점에 모두 일치한다. 도마는 창에 찔려죽었다. 그의 무덤이 있는 인도 마일아폴(Mylapore 멜리아포레)에 가면 알 수 있다.

사도 도마는 AD 70년 칼라미나의 원주민들에 의해 고문을 당하다가 화덕에 던져져 창에 찔림을 당하면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