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끼 순교자들(1597)

1549년 제수이트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위대한 선교사, 성 프란시스 차비어가 섬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운동을 시작했다. 사제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하는 호기심을 가졌지만 그들과 함께 온 상인들 상품에 더 가치를 두었지 뜨거운 열정이 없었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로 자라났다.

1597년에 일본 통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나라의 문제가 일본의 민족주의적 애국의 손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서 나온 크리스챤 예배를 중지하라고 명했고 26명의 크리스챤을 잡아 들였는데 그 중 19명이 일본인이었다. 한 달의 긴 겨울이 지난 3월에 사람들은 정죄 자에게 해당되는 벌로서 니쉬자카 언덕 위에 십자가에 매달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죄수들이 언덕 보리밭 두렁에 세운 십자가를 보았을 때 그들 스스로 자기 것을 얼싸안고 정죄받은 자 중 하나가 자기 손을 십자가 위에 놓고 못을 박아달라는 식으로 집행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체인과 쇠줄로 묶어 놓았다. 집행관 분대가 그들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는 일을 마치기까지 시간을 조금 허락했다.

정죄받은 사람들의 나이와 배경은 서로 혼합되어 있었다. 루이스 이바라키는 단지 12세였다. 그는 그의 십자가로부터 천국으로 날아가는 환상을 보면서 죽었다. 쿄토의 요한은 19세로서 제수이트에 의해 잘 교육받은 크리스챤 부모에게서 출생되었다. 그날 아침 그는 처음으로 제수이트의 서원을 했다. 바울 미끼는 사무라이 군인의 아들로서 30세였다. 그는 안수를 받아 그 그룹에서 재능있는 설교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다. 십자가위에서 그는 관망자들에게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외에 다른데서는 구원을 찾을 수 없다. 나는 아무 죄를 범하지 않았지만 죽는 유일한 이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설교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죽는 것이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형제 필립은 멕시코 사람이었다. 그는 멀리 계신 자기 어머니가 그의 첫 번 미사를 위한 예복을 만들고 있었다. 13세인 형제 안소니는 그의 앞에 있는 군중 가운데서 울고있는 자기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모든 순교자들은 히데요시의 집행관들이 언덕 위에 침묵을 가져오기까지 함께 기도하며 찬송했다.

거의 200년 동안 일본의 그 크리스챤들은 지하에 묻혔다가 마침내 1850년 일본이 허용한 한 프랑스 사제에 의해서 그것이 발견되어졌다. 오늘날 26명의 순교자들의 기념관이 최초의 숨겨진 순교자들이 나타난 나가사끼 교회의 모사(replica)위에 세워졌다. 본래의 교회는 1945년 원폭에 의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