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가루의 비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의식, 상징, 그리고 모형들을 직접 적용하면 복음을 모호하게 만들고 심지어 복음과 반대되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 예가 레위기의 제사 제도의 적용이다.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향기로운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 레위기의 5대 제사,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이제는 제사의 참 의미를 맛보며 살아가게 하셨다. 그 중 소제는 고운가루를 드리는 제사로 어떻게 완성되었나 알아보자.

첫째, 고운가루를 불태우거나 번철에 기름과 유향을 넣어 만든 떡을 불에 태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두 가루처럼 드려진 삶임을 가르친다. 가루는 곡식의 피라고 말할 수 있다. 아벨이 드린 짐승 제사나 가인이 드린 곡식 제사의 재물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제사하는 자의 믿음에 의해 다른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고운 가루처럼 자신을 모두 희생하여 구속의 대업을 이루셨다. 그의 모든 생각, 행동, 말 등이 부서진 가루처럼 되어 자기 백성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소제처럼 고운가루의 삶을 살라고 명하셨다.

고운가루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자아부인의 삶이다. 자기금욕이나 자기말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의 뜻에 자기를 굴복시키고 그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겸손과도 구분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하다. 인위적인 자아 부인은 눌려진 용수철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에 이르면 더 크게 교만으로 튀어 오르기에 부서진 가루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질 수 없고 또 져서도 안된다.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하셨다. 우리는 그 위에 서서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진 자로 살아간다. 이것은 모두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을 가리킨다. 먹으나 마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현실의 삶에 당하는 각 자의 고난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무슨 뜻이 있음을 기대하고 인내하며 가는 것이다. 가루가 아니면 떡이나 빵이나 과자를 만들 수가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가루의 삶이 아니면 모든 형태의 삶에서 결코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고운가루의 삶이 주 만을 따라가는 좁은 길의 실재이다.

둘째, 고운가루를 불태우듯이 소제인생을 살 때 지극히 거룩하며 향기로운 삶이 된다. 성경에는 두 가지 소제를 소개한다. 하나는 사적인 소제인데, 대제사장이 매일 드리는 제사이며(레6:14), 제사장 자신을 위해 드려지며,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속죄 제물(레3:112,12)과 질투의 속죄 제물(3:13)로 사용 되엇다. 공적으로 드릴 때는 12진설병, 유월절 둘째날과 오순절의 요제로 드려졌다. 고운 가루를 드린 소제 인생의 비죤을 가질 때 사람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