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동산

누가복음 9:26절의 주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 중,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본을 보기 위해 가야 될 곳은 겟세마네 동산이다. 그 장소에 일어난 잠깐 동안의 사건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떻게 나타났나?

첫째, 죽을 고민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고민이란 심적 갈등 상태로 일종의 스트레스이다. 온 몸으로 당하는 스트레스로 죽을 지경이 되셨다고 말한다. 욥이 고생 너무하니까 죽을 것을 생각했고 아무 희망을 느끼지 못했고(13:15),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며 자신을 낙엽, 검불, 낡은 물건, 좀먹은 의복 같았다고 한다.(13:25) 오랜 질고와 친구들의 비난, 그리고 가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만났기 때문이다. 욥의 고난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고통은 얼마나 컸든지 땀이 변해 피가 되는 자리까지 나갔다. 주전 1200년 전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때의 고통을 자세히 설명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6)“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셨나이다.”(15)고 했고 그리고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14)”라고 했다. 그 예언대로 그 동산에서의 고민은 기도하는 시간까지 연결되었다. 죽을 것 같은 고민거리가 어디 있는가? 그 때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순간이다. 그 때 감사하고 원망하지 않고 삼키는 일을 할 때 부활 생명을 체험하게 된다.

둘째, 극한 시험을 당할 때 십자가를 지셨다. 그 동산에서 주님은 사탄의 시험을 당하셨다. 성부께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옮겨 달라”(막14:36)고 구하셨다. 이것은 힘들다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주신 잔일지라도 참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열두 영되는 천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권세를 행사하고픈 자극적 고통의 순간이었다. 유대광야에 초자연적 권능을 사용하려고 충동시키는 사탄의 자극적 유혹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결론은 아버지의 뜻에 숨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구했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의 피난처이다. 자기의 비장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인데도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숨어 이 시험을 피하셨다.

셋째, 팔리는 자리에 들어가실 때도 십자가를 지셨다. 잡히는 그 순간에 급히 몰려오는 시험에서도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고수하셨다. 현장 거래가 이루어지는 그 수모를 그대로 당하셨다. 기도의 성산이 강도의 소굴로 변한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은 천사들이 돕는 능력을 체험하셨다. 십자가 지는 주님 위에 아버지의 은혜가 임하여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첫 발을 디디신 것이다. 원수의 손에 넘어가는 자리일지라도 주님은 담대함으로 십자가 지심으로 더 큰 일을 이루신 것처럼 위기의 때에 십자가 길을 걸으면 부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욥은 그 자리를 어렴풋이 알고 그 길을 걸었지만 우리는 주님과 구름 같은 증인들을 보면서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리 속에 큰 불신앙이 자리 잡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동산에서 자기 십자가 지신 주를 보며 나의 고민, 시험, 그리고 절박한 현장을 만날 때도 내 몫의 십자가를 바로 지고 나가자. 주님이 반드시 도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