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속에 서 있는 십자가

겟세마네동산에서 잡히신 주님이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집(요18:12)으로 먼저 가서 심문당할 때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한다. 십자가는 큰소리 침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자아 부인함으로 따르는 것이다. 겸손과 온유와 복종으로 따른다는 뜻이다. 다음 날 아침 가야바에게로 넘겨졌다. 어떻게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셨는가?

첫째, 거짓 증거를 받는 중에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막14:57에 보면 대제사장들 서기관 장로들이 모여 거짓증인들을 세워 죄를 찾았다. 성전을 헐면 사흘에 짓는 자라는 것이다. 외식에 눈이 먼 그들에게 성전의 실체가 메시야인 예수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성막과 성전의 실체가 임했는데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의 겉만 핥고 있었다.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 것은 믿지않았기 때문이고 그 믿지 못함은 아버지가 이끌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택한 자가 아님을 스스로 증거한 셈이다. 그러나 그를 믿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고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요8:12) 이세벨이 거짓증인들을 세워 나봇을 돌로 때려 죽이는 그 억울한 자리처럼 주님은 최대의 사기극 중에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신자는 거짓 고소를 당할 때도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둘째, 불법 심문을 당하실 때도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가야바 자신의 직분자체가 거짓이다. 안나스의 교활한 수단으로 사위가 대제사장직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불법이다. 그리고 장인의 의제를 그대로 따른 재판은 불법 재판임을 증거한다. “네가 그리스도냐?”라는 그의 심문에 주님은 “내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응수하셨다. 인자의 승귀와 심판주로 강림과 실존적인 목격에 관한 주장 자체가 자신의 하나님되심과 메시야되심을 또다시 증거하는 것이다. 일찍이 다니엘의 인자 예언대로(단7:13) 자신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을 예언하심이다. 우리 시대에 그 인자는 그대로 오실 것이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억울함을 당하시며 참으셨다.이것이 십자가의 실상이다.

셋째, 체형을 당하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65절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림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때리는 최대의 치욕이다. 때리는 자의 손이 말라 버리는 것도 아니고 침뱉는 자의 입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우리가 받을 수욕을 그대로 받으신 것이다. 바산의 힘센 소들이 밀어 붙이는 것과 같고 내 뼈를 셀 수 있는 자극적인 고통이었다. 정확한 계산은 긴장된 끈질긴 팽팽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주를 위해 매 맞고 수치당하는 체형을 당할 때 이기는 길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 뿐이다. 앞서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피 흘리며 견디며 걸어갔던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길을 걸어가야 할 자가 바로 우리이다. 대제사장 법정에서의 자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주목하고 그 길을 따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