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보리 언덕

하나님의 구속계시의 숱한 그림과 상징들은 이 날, 이 순간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여자 후손, 가죽 옷, 제단, 방주, 성막 그리고 성령의 영광의 임재를 통해 보이던 상징으로 속죄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하늘 지성소에 일곱 번 뿌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뺀 모든 역사는 무의미하고 십자가가 중심에 없는 인생은 헛되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십자가를 중심하면 살아난다.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주님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을까? 마가복음15:16-41을 중심해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가 목마르다.(23) 몰약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심은 마취제 투여가 배려된 군병들의 최소한 자비마저 거절하셨다. 인위적 방법을 모두 거절하신 셈이다. 물 한방울의 긍휼마저 거절되는 지옥 고통을 홀로 다 받으시려는 주님의 의지였다. 그래야만 자기 백성이 완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마름을 대신하셨기에 목 말라하는 우링의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으셨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사55:1)고 하실 수 있으셨다. 고독한 존재인 인생의 권태, 고독, 나태를 이기는 길은 십자가 길을 가는 것뿐이다. 거기서 우리 구주를 만나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둘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1, 29-32)” 성부께 버려지는 의식, 군병의 조롱, 강도들의 조롱, 그리고 행인의 버림도 괴로웠으나 성부에게 버려지는 의식은 고통 그 자체이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절규했고 창조물도 떨며 3시간 눈을 감았다. 성부의 단절에 대한 수동적 행위와 성자의 능동적, 자원적 십자가 지는 행위가 한 사건으로 요약되었다. 본으로서의 십자가가 자기 백성의 담보로서의 십자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의식을 가질 때 십자가를 더 의지하라. 십자가 밖에 없음을 믿고 그에게 가까이 달려가라. 그 때 살 길이 생긴다. 구레뇨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복이 임한다. 주님의 십자가 효능은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십자가를 본받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복을 누린다. 그 복은 성령의 능력의 임재이다.

셋째,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다 이루었다. 6시간 매달려 고통하는 중에서도 주님은 십자가 효능, 두 샘플을 보이셨다.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함으로 인륜의 본을 보이셨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으면 천당 가는 본을 한 강도의 회개를 통해 보여주셨다.

십자가를 믿는 자는 이 두 가지가 뚜렷해야한다. 이것이 복의 골자이다. 구원과 윤리, 믿음과 행함 그리고 indicative와 imperative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를 통과할 때만 이루어진다. 겟세마네에서 갈보리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본을 보이신 주님은 우리의 구속을 완전히 이루셨다. 에덴의 성산의 영광이 갈보리 성산의 영광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믿는 우리는 그 효능을 활용해야한다.